투기 or 투자

예수님이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실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 중 이런 것이 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누가복음 4:5-7)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세상을 얻기 위해 오신 분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 찬송받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귀가 먼저 천하만국을 주겠노라고 제안을 했다.
대신 마귀인 자신에게 절만 하면.
모욕과 고난을 당하며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예수님 입장에선 아주 달콤한 제안이다.
“쉽게 세상을 얻어라”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 4:8)
이 대답은 단순히 절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하나님만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시다.
하나님만 천지의 질서를 만드신 관리자이시다.
그분만 경배하고 섬기는 것은 그분이 만드신 질서를 따르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땀흘려 일할 것을 명하셨고(창 3:19), 심은 대로 거둘 것이라(갈 6:7) 하셨다.
불로소득, 일확천금, 한탕주의는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에 위배된다.
어린 시절엔 세상을 위해 일하는 위인이나 봉사자가 되겠고 해도 세상을 살면서 물들기 마련인데, 학생 신분으로 건물주가 되어 놀고 먹겠다는 장래희망을 부끄럼없이 말하는 세태를 보면 기성세대가 다음세대에게 어떤 가치관을 보여 주고 있는지 말해준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나 성도의 의식도 별로 다르지 않다.
남들은 누리는데 나만 부자될 기회를 놓치고 바보될까 불안한 FOMO(fear of missing out) 증후군이 심상찮다.

심심찮게 “성도가 부동산 투자를 해도 괜찮을까요?”든지 “주식 투자가 성경적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투자’라는 단어로 아무리 포장해도 ‘투기’라는 속내가 감춰지지 않는다.
힘들게 땀흘려 수고하지 않고 돈을 벌려는 마음이든 자녀가 고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자녀들이 어떤 의식으로 물들고 있으며 하나님의 질서를 잘 새기고 순종하는 것은 뒷전인 부모의 왜곡된 사랑이든 마찬가지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기업이 운영자금과 개발자금을 대출로 조달하는 것보다 투자 받는 것이 낫다.
성도가 경제를 공부하여 전망있는 기업에 자금을 대고 그 기업을 응원하고 임직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에 따른 수익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도 중 몇이나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을지 의문이다.

당시 마귀는 나름 예수님을 상대로 효과가 있을 만한 유혹을 골랐을 것이다.
당연히 지금 사람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면에는 당연히 돈귀신 맘몬을 섬기는 배금주의가 깔려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늘 아래의 예수님의 경계를 기억해야 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9-21)

성공한 소수의 기적같은 수익과 다수의 허탈감과 생업에 대한 무기력, 그리고 실패한 소수의 파산과 가정해체가 매일 반복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도는 실기할까 불안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실까 불안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다.
급한 마음에 자신은 투기가 아닌 투자를 하는 것이고, 성경적으로 정당한 투자라고 인정받으려는 기대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려는 마음이 있는지 스스로 엄밀하게 점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혹시 교회에서 수익을 얻었으니 감사헌금 내고, 그렇게 얻은 소득의 십일조만 잘 내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로마시대 세리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직접 지으신 사람이 행복하길 원하신다.
사람이 돈을 그리 좋아하는 걸 아시면서도 좋아하는 만큼 주시지 않는 것은 행복은 돈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을 돈으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