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는 사도신경을 천천히 읽었다.
이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배하는 자리에 임하셔서 예배를 받으시길 구했다.
오늘은 개인별 찬송을 하는 대신 찬송가를 여러 곡 부르자고 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가족들도 좋다고 했다.
주로 예배 시작할 때 성가대의 송영으로 자주 불리는 찬송이다.
하지만 자주 듣기만 했지 실제로 잘 부르지는 않는 찬송이다.
실제로 불러 보면 그 가사가 얼마나 일상의 영성을 말하고 있는지 놀란다.
자고 일어나는 작은 일상 중에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는 간절함이 와닿는다.
어제 법대 동기들을 만나고 나서 그런지 이 찬송을 부르고 싶었다.
이 부르심은 또한 기존의 기독교인을 향해서도 늘 있는 부르심이기도 하다.
후렴의 “지금 오라”의 ‘지-‘를 4박자를 맞추기가 까다롭긴 하지만 그 4박자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잃은 양을 찾으시는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찬송하는 곡이다.
첫음이 고음이고 중간중간 바로 이어지는 음과의 폭이 넓어 부르기는 까다롭다.
하지만 바로 그 곡조가 아주 서정적이라 정서에 호소하는 부분이 크다.
성경은 누가복음 4:16-27을 한 절씩 돌아가며 읽고 설교했다.
재물, 신분, 권력 등의 격차가 있는 구조는 인간의 죄로 생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현재 구조 내에서 지금 아래 있는 사람이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은 구약부터 계속 평등과 공평을 말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배계급을 상징하는 사자와 피지배계급을 상징하는 어린 양과 어울리는 세상이라고 선포했다.
예수님이 그 복음을 말씀하셨더니 메시야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이 오히려 배척한다.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니 자기들을 로마를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이다.
여전히 죄악의 틀에 갇혀 자기의 욕심대로 복음을 왜곡되게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는 그것이 기복주의로 나타났다.
한국 교회가 ‘내가복음’을 버리고 ‘예수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성찬을 하면서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쉽게 가시적으로 표현된 것이 성찬이라 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겸상을 하는 ‘성찬’.
그래서 성찬은 행하는 것 자체가 기존 사회구조에 반대하는 엄청난 메시지이다.
구약과 신약의 축도를 하고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