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서 맨발로 바닥을 딛는데 뭔가 불편했다.
그래서 실내화를 신기 시작했다.
20년간 함께했던 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에 작은 집을 세로 얻어 나 혼자 들어갔다.
아무 것도 없는 빈 집에 집에서 갖고 온 보료와 얇은 담요와 베개만 있었다.
나머지 가재도구를 마트에서 샀다.
밥 그릇 하나, 국 그릇 하나, 냄비 하나, 수저세트 하나 등등.
그 때 빼놓지 않은 것이 실내화이다.
유명 브랜드 점포도 여러 군데 가봤지만 발이 편하지 않았다.
마트에서도 슬리퍼 비슷하게 생긴 것은 다 신어봤다.
그럼에도 발이 편한 것을 고르지 못했다.
여러 종류의 슬리퍼가 비닐에 싸여 세로로 꽂혀 있는, 그래서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판매대에서 내게 맞는 실내화를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그 실내화를 신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실내화를 벗지 않았다.
잠을 잘 때만 벗었는데, 차마 얼굴 옆에는 둘 수 없어 보료 바로 옆 누운 내 허리춤에 실내화를 벗어 두었다.
나는 어쩌면 심정적으로 그 실내화를 의지했는지 모른다.
거의 1년간 기도하고 고민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정한 사임이지만, 그 다음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할 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실내화는 내가 편하게 디딜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그 실내화 위에 오르면 안심이 됐다.
상념에 젖어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녘에 베란다로 나가 하나둘씩 전등이 꺼지는 아파트를 보며 한숨을 쉬는 불편함 속에서도 실내화만은 편안함을 줬다.
이 실내화를 신은 지 만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게 됐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
50전후로 겪은 그 큰 변화의 과정을 함께 해준 실내화는 내게 여전한 안정감의 상징이다.
그런데 아내가 작년부터 계속 실내화를 바꾸라고 했다.
눈만 뜨면 신고 다녔으니 실내화를 빨 새가 없었다.
마트에서 다른 실내화를 찾아보기도 하고, 아내가 권해 주는 다른 실내화를 신어보기도 했지만 맘에 들지 않았다.
똑같은 것을 찾았지만 다시 내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봐도 낡고 더럽다.
빨아서 다시 신을 수 있을 정도도 아니다.
며칠 전 마트로 가서 할인하는 슬리퍼를 보고 뒤적거리다 발이 편한 것을 샀다.
물론 이전 것보다 편하지 않다.
3년간 익숙했던 것이 어찌 순식간에 바뀌겠는가.
예수님도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5:39)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내화를 바꾼 것은 내가 새 실내화를 신고 싶은 마음이 생긴 이유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이 새 마음을 가질 때 헤어스타일을 바꾼다든지, 새로운 직장에 들어간 사람이 새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
나는 지금 방황하지 않는데, 혼란스럽지 않은데 혼란스러웠을 때의 실내화를 여전히 신고 있는 것이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한 순간에 마음을 고쳐 먹고 3년간 나를 지탱해줬던 실내화를 버렸다.
나는 이제 다른 걸 딛고 서 있다.
이 실내화가 점점 편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