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山上垂訓)’의 의미와 가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 해주신 보배와 같은 말씀이 있다.
성경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그리고 누가복음 6장 20절부터 49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산에서 베풀어진 말씀’이라고 해서 ‘산상수훈’ 또는 ‘산에서 가르쳐진 보배와 같은 말씀’이라고 해서 ‘산상보훈’이라고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등등.
정말 주옥같고 보물같은 말씀들이다.
그런데 정말 지키기 힘들고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다가온다.
어떤 의미에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의 율법보다 더 무겁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주신 신약의 율법인가?
산상수훈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산상수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오버랩되는 성경의 한 장면을 이해해야 한다.
구약에도 하나님이 따르는 자들을 산으로 불러서 살아갈 규칙을 말씀해 주시는 장면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이다.


시내산에서는 하나님이 빽빽한 구름과 연기와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 가운데 임하셨다.
특별히 빽빽한 구름은 구약에서 종종 나타나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가만히 서서 구경하듯 볼 수가 없어 다 죽은 듯 엎드렸다고 했다.
산상수훈 장면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따로 빽빽한 구름이 필요없다.
희한한 것은 사람들이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실체보다 하나님 임재의 배경이 된 빽빽한 구름과 번개과 천둥을 더 신비롭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와 말씀대로 사는 제자를 삼으셨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겠다며 율법을 주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율법을 지키겠다는 언약을 맺었다.
우리가 보기엔 지켜야 하는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지금 여기서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대의 언약을 맺는 형식이다.
이 부분이 산상수훈이해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스라엘 그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면서 언약의 당사자가 될 자격이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군대에 가고 세금을 내고 계약을 맺고 그대로 사는 책임은 자유시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유시민으로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대접을 처음으로 받은 것이다.
내가 행위능력이 있고, 내가 책임능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부담스러운 내용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짓는다고 했을 때 나중에 모세가 그만 가져오라고 할 정도로 자기의 소유들을 가져왔다.
오랜 기간 노예로서 개인소유가 없이 살다가 자기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보통 더 집착하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그들에게는 자유시민으로서 책임을 지고 부담을 지는 것이 더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헌신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다.

예수님이 산에서 사도와 제자들에게 하신 산상수훈이 이런 의미이다.
이 산상수훈을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아 다 들어라, 다 이렇게 살아라” 하신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 곧 사도와 제자들로 국한하셨다.

분명히 하나하나의 내용은 우리가 그대로 살기에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하지만 왜 예수님이 이 부담스러운 내용을 우리에게 일부러 구별하여 주셨는가 그 의미를 알면 부담의 성격이 좀 달라지게 된다.
우리 모두는 예전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계획 대로, 내 욕심 대로 살려고 애썼던 사람이다.
그런데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것이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사슬에 매여, 죄의 꼭두각시로 살았던 것이고, 실상은 영적으로 고통과 비참함 속에서 살았던 삶인 것을 깨닫게 되면 산상수훈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산상수훈을 율법처럼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산상수훈을 잘 배우게 되면 부담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정해 주시는구나,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겨주시는구나’라고 감격하게 된다.
이어서 ‘부담스러워도 책임을 져야지, 감당해야지, 내게 이런 기대를 해주시는데 감사하며 살아봐야지’의 수준이 된다.

산상수훈을 내용 하나하나를 살피며 이건 이렇게 지키는 것이 옳고, 저건 저렇게 지키는 것이 옳다고 따지기 시작하면 보배로와야 할 말씀이 구약의 율법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고약한 율법이 되어 버린다.
내가 산상수훈을 지킴으로 산상수훈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구별하여 산상수훈을 주셨다는 데 산상수훈의 가치와 무게가 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해를 당하기도 하고 고생하기도 했지만, 남의 짐을 지기도 하고 우리의 것을 주께 드리기도 했지만 기쁨으로 이 신앙을 지키고 전수해 온 것이다.

‘내게 요구하시는 내용’보다 내게 ‘왜 이런 걸 요구하시느냐?’가 산상수훈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