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誓願)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전도서 5:5)

이 말씀을 읽고는 ‘서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거나 ‘서원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많은 것 같다.

서원은 야곱이나 입다처럼 간절히 바라는 것을 위해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실인같이 감사와 성결의 헌신을 위한 서원도 있지 않은가.
피해가 될 일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도 적용하는 보신주의가 한국 교회에서 서원을 사라지게 만든 것 같다.
무속주의, 기복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서원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성적 신앙을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보신주의적 태도로 변질한 것도 문제이다.

문맥 속에서 읽고 또 읽으니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으로 반응하는 자발적 서원을 하고 성심으로 그 서원을 지키며 구별되게 살기를 바라는 의미이다.

시작은 다르다고 알고 있지만 술과 담배를 금하거나 절제하는 것도 그렇다.
술과 담배가 죄가 아니라고 해서 담대하게 하는 기독교인들이 간혹 있다.
자기 소신이니 뭐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술과 담배를 금하는 한국 교회의 전통을 무작정 율법주의라고 정죄하지 않으면 좋겠다.
물론 맹목적인 율법주의식으로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나실인적 적용을 하고 있다고 본다.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목사가 요구하지도 않은 금주와 금연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혹시 다른 소신으로 술이나 담배를 하게 될지라도 “나도 왕년에는 그랬지”라며 초신자의 순수한 신앙적 결심을 유치한 것으로 만들고, 술과 담배를 하며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율법주의적 신앙을 초월한 모범인 양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어려웠을텐데 귀한 결심하셨다”고, “그런 마음이 신앙성장에 참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한국 교회가 자기 소원을 위한 서원이 아닌 감사와 성결을 위한 헌신의 서원을 회복하면 좋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콜라, 커피, 영화, TV를 끊은 적이 있다.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몇 달 또는 몇 년씩.
일상생활을 하면서 하루종일 말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평생이 아니라도 좋다.
얼마간의 기간을 정해서라도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또한 은혜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