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와 보람의 차이

힘겨운 한 학기를 보낸 둘째에게 소감을 물었다.
“시원섭섭하지?”
“예, 좀 공허한 것도 있고요”
“뭔가 열심히 하던 일이나 기간을 끝냈을 때 공허감이 찾아오는 것 같더라”

예전 내 경험을 끄집어냈다.
“아빠가 대입 학력고사 시험을 마치고 얼마나 허탈했는지 몰라. 기분이 아주 이상하더라고. 몇 년간 공부한 것을 몇 시간 동안 몇 개의 문제로 평가되고 그것으로 인생이 결정된다는 사실이 너무 불쾌하고”
“아…”
아빠가 그런 걸 느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온 눈치였다.

“다른 학생들은 뭐한대니?”
“원래 오늘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아빠가 일찍 오신대서 약속 취소했어요”
“아빠가 일찍 오길 잘했구나. 코로나도 심한데…”
“그런건가?”
“보통 그동안 수고한 일이나 기말고사를 마치거나 하면 보람이나 성취감보다 허탈감이 찾아오는 것 같아. 그래서 학생들은 친구들을 만나 밥 먹고 술 마시고 놀고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푸는 거지. 그런데 스트레스가 풀릴까?”
“글쎄요”
“모든 것이 끝난 듯 밤새 놀고 먹어도 그 마음은 달래지지 않을거야. 그래서 그 다음 날도 또 나가 먹고 놀겠지. 그런데 다른 방식을 듣고 보거나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대안이 없으니 또 하는 거야. 다음 학기에도 그 다음 학기에도 또 그러겠지”

“학교에 다닐 동안은 방학이라도 있어서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간이라도 있는데, 학교를 졸업할 땐 이런 정서가 훨씬 더 커지는 것 같아. 아빠도 엄청 허탈했거든. ’20년 가까이 학창생활 보낸 결과가 이런 건가, 이걸 위해 그 오랜 세월을 보낸건가?’ 이런 정서…”
“오~”
“그래서 직장인들은 주말만 바라보고 산대. 주말에는 좋은 곳 놀러 가기도 하고, 맛있는 것 먹기도 하고. 그리고는 주중에는 그것 자랑하는 재미, 다시 주말에는 어디에 가서 뭐 먹나 궁리하고. 그런 인생 어떠냐?”
“저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래 너나 나나 좀 스타일이 독특하지.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텐데,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하는 것 같아”

“그럼 어떡하죠?”
“아빠도 공황장애로 아프고 나서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뀐 것 같아.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보람을 느끼는 방식으로 말야”
“과정을요?”
“응, 내가 사는 하루하루, 일하고 책 읽고, 사람 만나는 하나하나의 과정에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의미있는 하루였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보람을 느끼는 거지”
“어떻게요?”
“그래서 너무 정신없게 보내지 말고 중간에 잠시 점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을 갖는거야. 밤에 자기 전에도 좋고, 메모를 해도 좋고”
“그러면요?”
“인생을 살아보니 결과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어. 보통은 그 결과에 희비가 엇갈리고, 성공한 인생이 되기도 하고 실패한 인생이 되기도 해. 그런데 아빠는 이제 결과에 별로 연연하지 않아. 왜냐면 하루하루가 의미있고 보람있었으니까. 과정이 끝나도 허탈하지도 않아”
“그럴 수 있군요”
“아마 아빠가 아프기 전에 이걸 알았다면 아프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빠는 아픔을 통해 깨닫게 되고 알려 주지만, 니네는 아프기 전에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아빠의 바람이지만 그것 역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