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 초월과 자연의 구별이 없었다.
모든 걸 만드신 하나님이 나누지 않으셨으니 당연히 그런 구별이 있을 리 없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신 또는 영적인 존재는 멀리있거나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이미 그들의 일상은 그것을 고백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초기 역사에서 단군 사상이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거룩한 구역인 소도(蘇塗)와 그에 관한 일을 주관한 천군(天君)이 그것을 증명한다.
전세계 다른 민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경 발흥한 헬라 철학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이해했다.
초월과 자연.
헬라 철학은 자신을 정복한 로마 제국을 오히려 숙주로 삼아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영향은 당연히 기독교 신자에게도 미치기 마련이다.
헤브라이즘으로 똘똘 뭉친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에게는 영향이 크지 않을 지 모르지만, 누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워졌는지도 모르고 담임목사가 누군지도 알려지지 않은 로마 교회의 이방인 신자에게는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 영향은 어떻게 나타날까?
헬라 철학 안에서 종교는 자연의 인간이 초월의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자연이 초월에 이르려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헬라 철학에서 제시한 방법은 금욕이나 쾌락이었다.
쾌락은 단순히 육욕을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희열의 극단을 통해 초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오면 먼저 이원론적으로 ‘성(聖)’과 ‘속(俗)’을 구분한다.
교회와 세상을 나눈다.
교회 일에 힘써야 하고, 세상 일과는 거리를 두도록 가르친다.
‘열심’, ‘충성’, ‘헌신’을 강조하게 되고, 기독교는 다른 신자보다 더 열심히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의 눈에 띄어야 하고, 열심히 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인정받는 종교가 된다.
그래서일까?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로마서 서두인 1장 1절부터 7절까지에서 수동적인 ‘받은’이란 표현을 반복한다.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강조하는 부사가 없으므로 반복을 통해 강조한다.
성경을 읽을 때 반복되는 것만 잘 찾아 봐도 흐름을 이해하기 쉽다.
원어는 능동태로 표현된 것도 있지만 의미상 수동태라 영어 성경은 모두 수동태로 번역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역시 수동적 표현이다)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을 소개하는 2절부터 4절을 제외하면 각 절마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받은’ 것을 말한다.
복음은 ‘받는’ 것이다.
유난히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교회도 교회끼리 서로 경쟁하고, 한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는 사실 기독교의 성격이 아니다.
큰 교회가 되면 사람들의 눈에 띄고, 열심있는 성도가 되면 목사의 눈에 띌 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바른 신앙의 바로미터가 될 수 없다.
복음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사회의 경쟁 분위기와 고도로 경제가 성장하는 시기와 맞물린 데다가 미국식 복음주의의 큰 영향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받는’ 복음은 사라지고 ‘도달하는’ 열심만 남은 느낌이 짙다.
그 부작용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
빨리 돌이켜서 다시 ‘받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목사는 강단에서 성도의 열심을 선동하기 위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도달’의 거짓 복음 전하기를 그치고, 겸손히 ‘받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도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무속적 신앙의 틀을 버리고 겸손히 ‘받는’ 복음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