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빈 자리가 없다.
전에 교회 담임목사실을 가득 채우고 우리집 책장에도 넉넉하게 나눠 두었던 책을 한 자리에 모았으니 당연하다.
담임을 사임하며 교역자에게 우선 갖고 싶은 책 가져가게 하고, 청년들에게도 나누었다.
그래도 책장에 자리가 너무 부족하다.
신대원때 구입해서 틈틈이 읽었던 칼빈 주석을 처분하기로 했다.
칼빈 주석은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 쓴 성경 해석서이다.
종교개혁의 기치 중 하나가 ‘오직 성경’이니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설명서이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현대 정황이나 신학 흐름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투박하게 보일 정도로 강한 어조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종교개혁 당시의 치열함과 비장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초보 목회자였던 내게 많은 생각의 단초를 준 전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분을 결정했다.
감히 칼빈 선생님을 뛰어 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칼빈의 시대에 묶여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를 고민하며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의 시대와는 또다른 치열함과 비장함이 필요하지만 그 시대처럼 너무 전투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금장전집 외양 덕분에 소위 ‘평신도 기죽이기’ 용도로 제 몫을 했던 칼빈 주석은 내 책장에서 사라지게 됐다.
(후기)
이 의사를 밝혔더니 동생이 자기 책장에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해서 오늘 옮겨갔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