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도와 공동체와의 소통

아래는 3년 전 남서울평촌교회 담임을 내려놓고 부산에 내려와서 처음 교회밖 생활에 적응할 때 남긴 기록이다.

목사를 가장 목사답게 하는 것은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이 일은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경까지 1600여년간 기록된 고대문서와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여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다양한 형편 가운데 말씀하시고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을 먼저 경험하고 그 삶을 전하는 것이다.
목사의 자존감이 거기에서 나오기에 성도 수가 많지 않은 소규모 교회나 시골소재 교회도 사명지로 여기고 찾아간다.

나는 목사다.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 설교를 정기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설교준비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다들 즐겁고 편안한 주말을 보낼 때 목사는 성경을 다시 보고, 기도하고, 원고를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느라 전전긍긍할 때가 많다.
그래서 한 편으론 그 고통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주말을 보낼 수 있게 되어 홀가분한 마음이 있기도 하다.
설교준비를 위한 성경읽기를 하지 않아도 되니 성경읽기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른다.

그러나 설교를 할 수 없고 성경공부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마치 존재이유를 잃은 것과 같은 또 다른 고통이다.
가정예배를 하며 가족을 향해 설교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했다.
그 설교를 위해 따로 설교준비를 하고 설교원고를 작성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인 모임에서 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대문 쪽방촌에서 사역하시며 등대교회를 담임하시는 김양옥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일에 와서 오전예배와 오후예배에 설교를 해달라는 것이다.
처음엔 안부전화로 받았고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사양했다.
그리고 교회를 사임한지 두 달 여만의 요청이라 정서상으로도 어려웠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강권했다.
김 목사님이 쪽방촌 사역을 하기 위하여 동대문에 와서 처음 지하에 교회를 개척하고 너무 힘들 때 내가 김 목사님을 3년간 구제사역을 위한 집회와 구제주일에 계속 초대해서 많은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게 해줘서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설교의 기회를 잃고 내가 혹시나 의기소침할까봐 챙겨주시는 김 목사님의 배려를 읽게 되어 감사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교회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가족들에게도 이 기도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아마 가족들은 주말에 설교준비를 하지 않고 홀가분하게 지내는 모습을 좋게 보았을 것이다.
얼마 후 경남소재 합신교단의 교회에서 가을사경회때 말씀을 전해줄 수 있겠느냐며 연락이 왔다.
또 수도권 목회자들 모임에서 최근 내 사임전후의 내용으로 강의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나는 감사하며 응했다.
일정표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설교나 강의를 할 수 있는 일정이 하나씩 채워져 갔다.

어제 페이스북 메시지로 대구지역 교회에서 오는 주일예배에 설교해 줄 수 있겠냐는 문의가 왔다.
안그래도 10월과 11월은 일정이 있는데 9월이 없고 곧 추석연휴라 9월은 그냥 넘어가는구나 싶었는데 연락이 와서 감사했다.
그런데 덥석 하겠노라고 응하고 싶지 않았다.
만들어진 여건이지만 다시 하나님께 여쭙는 “정녕 내가 가서 말씀을 전하리이까?”식의 기도를 해야 되겠다 싶었다.
페북 메시지는 읽으면 읽었다는 표시가 나므로 오래 기다리지 않게 빨리 답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베란다에서 뒤로 기대어 성경을 읽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설교하러 가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 여쭙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내 머리는 이미 가서 무슨 설교를 하면 좋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야?”라며 머리를 흔들며 그 생각을 털어내고 다시 여쭈었다. 그런데 또 설교생각을 하고, 다시 머리를 흔들고 여쭙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다가 한 마음의 음성을 들었다.
“네가 주일설교를 하러 가면 네 가족들 주일예배는 어떡하냐?”아차 싶었다.
앞으로 주일예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금해 하는 아이들에게 그동안 방문하지 못했던 아빠의 신학교 동기 목사님들의 교회나 탐방해 보고 싶었던 교회의 예배를 같이 참석하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고 아이들이 자기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며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를 방문중에 있었고 그 다음 교회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 혼자 설교를 하러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가족이 다같이 그 교회예배에 참석하고 나만 설교하면 될 것 같아 다같이 가자고 이야기해야 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또 다른 마음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주장하지 말고 이 일을 놓고 네 가족들과 상의해라”나는 기도를 마치고 홈스쿨링중인 아내와 아이들을 불렀다.
그리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던 나만의 기도제목과 모든 과정을 알리고 내가 결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런 기도를 했었냐며, 그런 생각을 할 줄 전혀 몰랐다고 했다.
아내도 더 이상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결정은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차를 오래 타는 것을 싫어하고 요즘 중2병을 미리 앓는 것 같은, 그래서 당연히 반대할 것으로 예상했던 셋째가 가장 먼저 아주 쿨하게 “그럼 같이 가요.”라고 말했다.
내가 의아해 하며 고속도로로 차를 타고 한참 가야하는데 괜찮겠냐고 재차 물었더니 오는 길에 놀면 된다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둘째와 막내도 불편하지 않게 선뜻 동의했다.
너무 감사했다.
내가 주장했으면 당연히 따르겠지만 억지 분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전혀 거리낌없이 결정을 해줘서 참 좋은 분위기가 되었다.

메시지를 보낸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다.메시지를 읽고도 바로 응답하지 못한 이유를 밝혔다.
그런데 통화중에 깜짝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설교 날짜가 오는 주일이 아니라 다음 달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촉박하게 설교부탁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정말 급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본 것이었다.
그 목사님과 통화하며 한바탕 웃었고 가족들에게도 수정된 사실을 알리고 오는 주일예배는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이번 일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웠다.
내가 기도하던 여건이 만들어졌음에도 얼른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정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맞느냐 여쭙는 것을 생활화해야겠다는 점,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그게 최종결재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위해 공동체와 그 과정을 나누고 상의하게도 하신다는 점,
어떤 시기에는 하나님의 응답과 예배하는 행위보다 공동체의 분위기가 중요할 수 있다는 점,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참 중요하지만 그 일 중에도 가족간에 서로의 사정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
무엇보다 어리석은 내가 성급하게 일처리를 하지 않고 깨닫고 그 과정을 경험하게 하신 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