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도에 개봉된 ‘이퀼리브리엄’이란 공상과학영화가 있다.
배경이 미래의 어느 세상인데, 정부가 시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정서를 사라지게 만드는 알약을 정기적으로 먹게 만들고 그걸 어기면 사회를 무너뜨리는 반역자로 여기고 죽이기까지 한다.
시민들은 거의 비슷한 구조의 가옥에서 살며, 무채색의 제복같은 옷을 입고, 무표정으로 사회의 부속품처럼 산다.
계속해서 그런 사회구조와 방식이 좋다는 선전이 나온다.
개성과 정서가 전혀 없는, 나치보다 더 지독한,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이다.
주인공은 그 알약을 먹지 않고 개성과 정서를 가지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심판자인데, 아내가 약을 먹지 않아 죽임을 당하면서 주인공도 비밀리에 약을 먹지 않게 된다.
주인공은 몰래 시집을 읽기도 하고, 감정의 요동도 경험한다.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은 ‘균형’, ‘평정’이란 의미이다.
영화 속 세상은 극단적인 몰개성과 무감정으로 평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통일되지 않는 개성과 때론 혼란스럽기까지 한 정서를 인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매트릭스는 잊어라’라는 부제 답게 주인공이 ‘매트릭스’의 주인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놀라운 액션으로 몰개성과 무감정의 사회를 무너뜨린다는 내용이다.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다가 자칫 기독교 공동체를 영화 속 이퀼리브리엄 사회처럼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를 읽으면 ‘항상 기뻐해야만’ 할 것 같다.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항상 기뻐하지 않고, 어쩌다 기뻐하든가, 슬퍼하든가, 괴로와하든가, 힘들어하든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교회당에서 모이는 사람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기쁘지 않아도 기쁜 척하느라 슬퍼하고 괴로와하고 힘들어하는 정서를 애써 감추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일까?
사람들이 다른 정서를 누리지 말고 ‘항상 기뻐하기만’을 원하실까?
그렇다면 영화 이퀼리브리엄 속의 사회가 무엇이 다른가?
교회는 기쁘게 사는 여부를 감시하는 감시탑이 아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절대 평정에서 전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하나님의 정서에 대해 성경은 의외의 표현들을 많이 하고 있다.
기뻐하시고도 하고, 진노하시기도 하고, 후회하시기도 하고, 안타까워하시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성경에 표현된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다.
전지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요 주관자가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할 만한 이퀼리브리엄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요동치는 것 같고 심지어 변덕스럽기까지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퀼리브리엄은 인간적이지 않다.
곧 인격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이신론(理神論, deism)의 신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다.
인격적인 분으로 묘사하기 위해 감정적인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정서가 풍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 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런 하나님을 닮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다양한 상황을 뛰어넘는, 획일적으로 엄청난 절제를 필요로 하는 특정 감정이나 정서를 ‘하나님의 뜻’이라며 강요하실 리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라’의 해석과 적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아래 ‘쉬지 말고 기도하라’와 ‘범사에 감사하라’도 마찬가지이다.
따로따로 정말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고, 무슨 일이 생기든지 감사하기만 해야 한다고 적용할 내용이 아니란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이 땅에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화를 내시며 심지어 욕설도 내뱉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이 된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그 아래 다른 절과 함께 종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지금은 괴로와서 신음이 나오고, 현재는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인격적이시고 미더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신앙적으로 승화된 표현을 통해 우리의 정서를 격동시키는 현실에 침몰되지 말라는 권면일 것이다.
아픔과 슬픔을 당한 성도에게 영화 ‘이퀼리브리엄’처럼 폭력적이게도 보일 수 있는 ‘항상 기뻐하라’만 문자적으로 강요하며 울음을 그칠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왜 심한 박해로 괴로워했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특별히 그런 신앙적 권면을 했는지 형편을 살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로마서에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권면에 이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정서가 풍부하시지만 감정에 휘둘리지는 않으신다.
사람도 정서가 풍부한데 연약하여 감정에 매몰되기도 한다.
사람이 하나님 닮은 풍부한 정서를 누리되 치우칠 때는 절대자를 의지함으로 매몰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신 뜻, 진정한 이퀼리브리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