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생계, 이중직, 부르심

목사가 다른 직업도 갖는 것을 ‘이중직’이라 한다.
대부분 생계를 위해 갖는 것이다.
간혹 자아실현을 위해 행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의사나 교수 등 전문직을 가지고 목사직도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엔 목회만으로 생계가 어려워 택배나 대리기사 등 다른 직업을 갖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교인이 낸 헌금으로 생활비를 받는다.
이건 기독교 내에서는 구약 성경에서 제사장이 제사장의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백성들이 재정적으로 책임지도록 한 것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바울도 신약 성경에서 위의 일을 근거로 제시하며 원칙적으로 교회의 목사들의 생계를 교인들이 책임지도록 했다.
비단 성경적 근거가 아니라 사회 통념상으로 목사를 종교서비스직으로 봤을 때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자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에게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교회라는 단체의 운영비를 부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자신이 돈을 냈다는 이유로 목회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돈을 냈으니 돈을 낸 만큼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인데 마치 주식회사의 주주 노릇을 하겠다는 심보이다.
의외로 이렇게 시달리는 목회자들이 많다.
이중직을 택하는 목회자 중에 이런 일로 깊은 상처를 입고 재정적인 이유로 소신있게 목회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자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굳이 원칙을 따지자면 교인이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원칙은 율법이 거의 국법의 역할을 한 구약 시대에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성전 업무에 전념해야 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중에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들은 바울도 장막 만드는 일을 했으니 목사들도 생계를 위해 본인의 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예외를 원칙으로 오해한 경우다.
바울이 처음부터 장막 만드는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아마 터키 지역 전도여행 중에는 후원이 잘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 남부에서 전도여행을 할 때에는 바울을 후원하는 곳이 빌립보교회 한 곳밖에 없었다.
바울도 생활비 지원이 없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비량을 택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도 후원이 잘 되었으면 장막 만드는 일을 하지 않고 평일에도 전도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교회가 목사의 생활비를 잘 지급하면 좋을 것이다.
한 가지 일도 감당하기가 어려운데 두 가지 일을 잘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양질의 목회적 서비스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할 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생계의 어려움으로 정기모임이 있는 수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한 월화와 목금으로 일하는 목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은 주로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하는 교회들의 회의인 노회에 참석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아직 이중직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라 드러내놓고 결석이유를 내놓기도 곤란하고 이해받기도 어렵다.
아직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두 가지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공동체적으로 목사의 이중직을 예외적인 경우로 허용하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못한 원칙을 다종교사회인 현대에서 형편이 되는 자들이 중심이 되어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현실을 반영한 공동체적 인식 전환과 대책이 필요하다.

또 하나는 개인적으로 목사 자신의 부르심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꼭 목사가 되어야 하고 목회를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목사는 한 번 얻으면 벗을 수 없는 신분이 아니라 직분이다.
감당할 수 없어 직분을 벗는 것은 오명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긴 하지만 공동체적으로도 확인되어야 한다.
다윗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될 것이라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열두 지파의 인정을 받았을 때이다.
본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확신하지만 한 때 신앙적 열정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선지자도 모세처럼 부르심을 받은 후 한 평생 지도자로 살 수도 있지만 몇 개월이나 몇 년만 선지자로 살 수도 있다.
사울이 나중에 잘못하기는 하지만 왕위에 오른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인생을 착각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한 때 목사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좋겠다.
부르심이 아니었을 수도, 한 때의 부르심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걸 종신적 부르심으로만 생각하는 것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을 수 있다.

인생이 단순하지도 획일적이지도 않다.
인생이 반영된 교회도 그렇고, 목회나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더 복잡해진 21세기 사회에서 수천 년전에도 지켜지지 않은 원칙을 고수하지 말고 좀 유연하게 대처하면 좋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