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모세 앞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낼 지도자로 삼으시며 이스라엘 백성이 가야할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소개하셨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애굽기 3:8)
세상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디 있을까?
젖은 그 땅에서 목축하는 소나 양들이 번성해서 풍요롭다는 뜻일 것이고, 꿀은 진짜 꿀이 있기도 하지만 그 땅에서 많이 생산되는 대추야자 열매가 잘 익어서 땅에 떨어지면 꿀처럼 보인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땅의 실상은 소나 양들이 먹을 풀이 그다지 많지 않아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하고, 지금도 대추야자 농사를 많이 짓기는 하지만 건조한 땅이라 물을 끌어대는 관개 작업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냥 막연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과대포장으로 이스라엘을 현혹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을 푸는 열쇠는 구약은 늘 액면 그대로의 사건이나 말씀이 아니라 무언가를 예표한다는 걸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젖과 꿀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한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크게 흔들어 해방시키시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보이고 가나안에 이미 살던 일곱 족속을 쫓아내시면서 이스라엘만 잘 먹고 살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나?
하나님은 출애굽 직후 십계명을 주시기 전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을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를 설명하신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애굽기 19:5-6)
이스라엘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백성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라고 하셨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들을 신 앞에서 제대로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라와 그 백성의 풍성함을 보이고, 다른 민족들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에 흐르는 건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젖과 꿀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통하여 젖과 꿀을 온 민족에게 공급하시겠다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기자들을 통하여 그 땅에 진짜 흘러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땅을 통하여 세상을 향해 흘러야 할 것은 유대교식 제사나 기독교식 예배 자체가 아님을 드러내셨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잠언 21:3)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4)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에 진정 흘러야 할 것은 ‘정의와 공의’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흘러 보내고 싶으신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이다.
그것을 그 시대상에 맞게 잘 나타난 것이 율법이다.
율법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내용도 있지만 사람들끼리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며 살 것인지 아주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일의 맛보기가 되는 다윗의 통치에 대해 성경은 ‘정의와 공의’가 행해졌다고 표현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역대상 18:14)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종교적 자아도취에 빠져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버렸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도 세상의 약육강식 법칙을 따랐고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억압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들의 악행을 지적하셨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사야 5:7)
하나님은 인간을 정말 풍요롭게 하는 젖과 꿀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임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부패한 인간의 욕심은 오히려 정의와 공의라는 이름으로 억압을 행할 뿐이다.
인간에게 구원자가 필요한 이유이다.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가 오셔서 새롭게 이루실 나라에 대한 예언에서도 그 나라의 통치원리가 정의와 공의임을 나타내셨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이사야 32:1)
교회는 복음 전파에 힘쓰고 있다.
한 때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복음을 전하던 때가 있었고, 하나님이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많은 자들이 구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하나님이 인간을 복되게 하시고자 주신 복음의 풍성함을 나타내기엔 부족한 면이 있고,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면이 있다.
이제 교회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적 관념이나 의식을 붙잡느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놓친 공동체가 얼마나 비참해졌는지 성경과 역사가 말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은 역사를 알면서도 반복하는 것이라지만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먼저 개인적 구원을 강조하는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연구해야 하고,
교회에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고,
이 땅에 실현되기를 기도해야 하고,
각자 삶의 범위에서 작게 실천하고,
사회적 제도가 수립되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젖과 꿀로 대변되는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흐르는 땅이다.
이 땅에서는 정의와 공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교회가 솔직한 고민과 담론이라도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