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부활 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승천하시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하셨다.
그 후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땅 끝’에 이르기 위해 많은 핍박 속에서 선교를 하기도 했고,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오명을 쓰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도 ‘땅 끝’을 향해 가는 중이다.
이르러야 하는 ‘땅 끝’은 과연 어디일까?
어떤 무리의 ‘Back to Jerusalem’이란 구호처럼 서진(西進)했던 복음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
세상 문물과 동떨어진 오지일까?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거의 없는 현대에 선교신학의 중요한 담론이다.
나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땅 끝을 지향하셨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을 때 땅 끝에 오셨다고 믿는다.
둥근 지구에 무슨 땅 끝이 있으랴.
이제 세상에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다.
‘땅 끝’은 이미지이다.
‘땅 끝’은 더 이상 어디로 갈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과부와 고아의 아비임을 자처하셨다.
고대 세계에서 과부와 고아는 가난과 절망과 곱지 않은 사회적 편견으로 땅 끝 절벽 끝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양을 제물로 드릴 수 없어 비둘기를 제물로 바친 가난한 산골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여러 동생들과 30년간 사셨다.
예수님은 1천년간 외침에 시달려 상대적으로 천히 여기는 옛 스불론과 납달리 땅인 갈릴리에서 주로 복음을 외치셨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죄인이라 손가락질하며 인간취급하지 않는 세리, 창녀, 죄인들,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오명을 쓰고 평생 불행하게 살아야 할뿐더러 부정하다며 가족들도 접촉하지 않으려는 많은 환자들을 만나셨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도 버리셨다고 혐오하는 땅 끝 사람들을 만나셨던 것이다.
지금 땅 끝은 어디인가?
땅 끝 벼랑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교회에 들어오길 꺼려하는 사람들, 지옥 갈 것이라 낙인 찍은 사람들,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를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을까 소망해도 교회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알기에 감히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지금 교회가 혐오하는 사람들, 실은 그들이 교회가 진정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면 겸손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는 땅 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