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일주일의 첫째날인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
일주일의 마지막 날은 토요일이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안식교는 토요일에 집회를 한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요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후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사흘 째인 안식(토요일) 후 첫날 곧 일주일의 첫날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
그래서 성도는 그날을 ‘주의 날(요한계시록 1:10)’이라고 불렀다.
주의 날 곧 주일인 것이다.
당시 로마의 극심한 핍박 속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잠자던 주일 새벽이나 늦은 밤에 모임을 했다.
믿음이 흔들리다가도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은혜와 달라진 자신의 자리와 삶의 방향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날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힘을 얻었다.
주일은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영혼의 쉼을 주는 오아시스였고, 방향을 바로잡는 나침반이었으며, 살아갈 힘을 채워주는 충전소였다.
주일을 율법과 규칙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날과 그 시간이 너무도 소중해 빼앗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본말이 전도되어 전해졌다.
주일의 은혜를 맛보고 누려서 자발적으로 주일을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예배를 빠지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식(천국으로 가는 사다리가 있는데 주일을 빠지게 되면 발 받침대가 하나씩 사라진다는 예화)의 그릇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놀러 가더라도 오전 7시 예배에 참석하고 가면 후환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고 해서 거룩할 성(聖) 지킬 수(守), 성수(聖守)라는 말도 생겼다.
개인의 육신을 채우지 않고 오락을 삼간다는 의미야 좋지만, 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등 유대인이 랍비의 유전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제한하는 부작용도 생겼다.
그리고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앉아 있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맹종하는 사람들이 줄었지만 일부에선 아직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의 기준인 양 인식되고 있어 안타깝다.
오히려 삶의 태양이 다양해지면서 주말에 생업으로 더 바쁘게 보내야 하는 성도가 늘고, 소방공무원이나 경찰공무원 등 주일을 꼬박꼬박 지킬 수 없는 교대근무자를 고려하여 교조적으로 주일성수만 외칠 것이 아니라 진정 성도가 주일의 유익을 어떻게 누리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대책이 요구된다.
교회와 성도의 형편을 따라 목회자가 그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1년이 넘도록 성도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비극이 사라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