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생일에 행한 순종

오늘은 아내 생일이다.
평소 걷기나 운동을 싫어하는 아내가 막내가 등교한 직후부터 산책을 가자고 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소아시아 북부 비두니아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가려고 했으나, 그 길목인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마치 자기들이 처음부터 마게도냐로 가려고 했던 것처럼 했다고 나와 있다(행 16:6-10).
나는 이 말씀을 참 좋아한다.
연약한 사람이라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깨닫게 하실 때 냉큼 돌이켜 원래 그 일을 내가 원했던 것처럼 하려고 한다.
물론 내면적 회개가 우선된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니 아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첫 번째 순종은 아내가 산책을 원할 때, 나도 산책을 원했던 것처럼 마음가짐을 갖고 채비를 했다.
원래 오늘 바람이 거세진다고 해서 바람부는 블루라인파크를 산책하고 싶었으나 아내가 어젯밤 잠을 설치는 바람에 내 마음으로는 계획을 접고 있었다.
그러나 냉큼 돌이킨 것이다.

일기예보로는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강풍이 분다고 했다.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도 그렇게 일러 중무장하도록 했고, 나도 몇 겹으로 껴입었다.
장갑도 기본으로 챙겼다.

그러나 이게 웬일? 기온은 온화하고 오히려 흔한 바닷바람도 없었다.
100미터 정도 걸었을 때부터 덥기 시작했다.
장갑부터 벗어 들고, 이내 안에 입었던 경량패딩도 벗었다.
한 손에 접어 든 외투와 장갑이 계속 신경쓰였다.

청사포에서 블루라인파크를 따라 미포에 도착하자 우리 부부를 맞은 것은 빨간 동백꽃이었다.
“여보, 저것 좀 찍어줘”
나는 두 번째 순종을 했다.

순종하여 찍은 첫 번째 사진 [사진 강신욱]
순종하여 찍은 두 번째 사진

아내는 애기동백을 좋아한다.
2013년 내가 제주에서 요양할 때 아내에게 큰 위로가 됐던 것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애기동백나무였다.
특히 전에 보지 못했던 2층집 높이의 큰 애기동백나무와 흐드러진 꽃들, 그리고 그 아래 직경 5미터 정도로 떨어진 빨간 동백꽃잎들은 어제 본 것처럼 눈에 선하다.

순종하여 찍은 세 번째 사진

나는 은근히 미포를 반환점 삼아 돌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의외로 아내가 동백섬까지 걷자고 했다.
청사포에서 미포까지의 거리가 2km 남짓인데, 그만큼 더 걸어야 한다.
나는 세 번째 순종을 했다.
둘이서 한적한 해운대 해변을 걷는 게 얼마 만인가.

한적한 해변을 가득 채운 갈매기들
다양한 모습의 갈매기들

운동을 생각해서 카메라를 들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백사장을 가득 채우고 앉은 갈매기는 부산에 익숙한 나도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좀 선명하게 찍어 보고 싶었지만 갈매기들을 방해하기 싫어 스마트폰으로 멀리서 찍다 보니 화질이 조금 아쉽다.

동백섬의 명물인 인어상

동백섬의 인어상은 내가 어릴 때 보던 그 인어상이 아니다.
원래 인어상은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1987년 태풍 셀마로 인해 유실됐다.
지금 인어상은 1989년에 설치된 것이라고 하는데, 덴마크 인어상처럼 앉아 있고 ‘황옥공주’라는 익숙하지 않은 전설도 붙여져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긴 머리 풀고 허리부터 비늘이 있는 전통적인 인어가 좋다.

V자는 내 손이 아니다

오랜만에 동백섬에 왔으니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아내는 나 혼자만 찍으라고 했다.
위 사진은 네 번째 순종의 증거이다.
아내는 손가락을 내밀어 주었다.

동백섬에서 아내는 갑자기 지친 모습을 보였다.
힘드니 택시 타고 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다섯 번째 순종을 했다.
오늘 다섯 가지 순종 중 가장 다행으로 여기는 순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