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自尊感)

자존감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의 선결요건은 자신이 품위를 지키고 존중받을 만한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과정 중 가정에서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용납과 존중을 받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무한 경쟁에서 제대로 살아남느냐로 평가 받는 세상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갖기도 어렵고, 지키기는 더 어렵다.
성장하고 나이가 들수록 내 자신이 정말 작은 존재인 것을 확인하게 만드는 세상이다.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휴대폰 연락처에 사람들의 이름으로 수백 명을 채우고, SNS에 사진과 글을 올려 수십 개의 ‘좋아요’를 받아도 이내 허탈해지고 만다.
포장된 내가 아닌, 나를 나 자체로 받아주고, 나를 나 자체로 사랑하고, 나를 나 자체로 존중하는 대상을 만나지 않는 한 자존감을 갖기란 요원한 일이다.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 때, 내가 하나님과 관계없는 죄인일 때, 내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원수일 때 나를 이미 사랑하셨다고 했다(로마서 5:6,8,10).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지에 대한 신의 고백이다.

절대자가 나를 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신단다, 아니 받아 주셨단다.
절대자가 나를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단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절대자가 나를 내 모습 이대로 소중히 여기신단다, 세상에서 점점 작아지는 나를.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 그분의 사랑을 받은 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더 알아갈수록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의 소중함이 커진다.
그분의 사랑을 받은 내가 존귀하게 여겨지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나를 나 스스로도 사랑하게 된다.
좀더 품위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도 존귀하게 보이게 된다.
그제서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말씀의 실천이 시작될 수 있다.
자신을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바르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는 사랑하는 것이라 주장하지만 실상은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강요나 집착일 경우도 있다.
건강한 사랑이 아니니 당연히 상대방은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다.
착한 상대방은 사랑이라는 포장에 속아 거부하지 못하고 “이건 사랑이야. 내가 못된 마음을 먹으면 안돼”라는 자기최면으로 자신과 관계를 병들게 한다.
어불성설이지만 ‘사랑의 악순환’이다.

그래서 변치 않는 절대자 하나님 안에서의 자존감이 진짜이고, 꼭 필요하다.
나를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를 위해서도.

일부 기독교인의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기적인 행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진지하게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인 것 같다.
하나님을 만나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된 자로서는 할 수 없는 언행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고서도 세상적 승부욕이나 우월감으로 자존감을 만들려는 사람들만큼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