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현실과는 동떨어져 내세만 추구하는 것처럼 비치거나 사회질서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이 짙다.
심지어 기득권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독교에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이 있지만(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장 제1항), 이것은 국가가 교회처럼 행세하지 말거나 종교적으로 중립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지 기독교가 현실을 도외시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이후 구원자 메시야(신약에선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이 구약 이사야서에 있다.
”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 11:6-8)
사회 구조 속에서 사자, 표범, 이리, 곰은 지배계급을 상징한고, 그들의 먹잇감인 양, 염소, 송아지는 피지배계급을 의미한다.
그런데 메시야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현실에서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짐승들이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이사야 40:4)
골짜기는 사회에서 골짜기처럼 깊이 낮아진 계층을 말하고, 산이나 언덕은 사회에서 산이나 언덕처럼 높이 오른 계층을 말한다.
그런데 메시야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산이나 언덕이 낮아져서 평탄하게 되듯 사회 계층으로 인한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3)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인 61장에서는 노골적으로 말한다.
메시야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사회구조의 부조리와 압제로 마음이 상한 자, 갇힌 자, 슬픈 자를 위로하고, 자유하게 하고 오히려 ‘의의 나무’로 표현된 동량(棟樑)이 되는 세상을 말한다.
그들은 노래하며 그 기쁨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인간의 타락이후 사회적 비극은 강력한 무기와 권세를 가진 자들의 등장과 그들의 억압으로 사회 구조화되었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메시야는 그것을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타파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시는 분으로 약속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것을 역사 속에서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선택된 나라이다.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신명기 26:6,7)
이스라엘은 원래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압제하에 있던 백성인데 하나님이 선지자 모세를 통해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이 압제를 벗겨 주시고 세운 상징적인 나라이다.
처음 그 나라의 왕이셨던 하나님은 고대 왕과 백성의 언약의 형식으로 그들의 왕되심을 선포하셨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위기 26:12)
그리고 왕의 통치내용인 율법을 선포하셨는데, 그 내용 중에는 사회의 약자를 압제하지 말 것을 엄히 명하셨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출애굽기 23:9)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남북조가 나뉜 이후에도 북이스라엘이든 남유다는 명목상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말라기 3:5)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습의 증거를 노동자의 임금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로 제시된 사회적 약자를 압제하고 멸시하는 데서 찾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율법의 가치를 지킨다면 있을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구약 선지서에는 이런 모습을 책망하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비단 신정국가인 이스라엘만 해당되는 기준이 아니었다.
바빌로니아 같은 대제국도 마찬가지여서, 바빌로니아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전에 이미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예언했다.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압제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이사야 14:4)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점인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가 기득권을 옹호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메시야가 이룰 세상은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식으로 예표된다.
성찬은 예수님의 구원을 누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한 계급이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주인과 노예가 한 상에서 평등하고 평화롭게 먹고 마시는 세상을 나타낸다.
솔직히 당시 주인된 입장에서도 하루 아침에 자기가 부리던 노예와 겸상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좋은 마음을 먹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사람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성취된 세상의 상징이며 성도가 누리는 현실이다.
당시 로마로서는 서로 다른 신분이 겸상하는 성찬이란 의식은 신분사회라는 사회의 구조를 흔드는 것이었기에 용납할 수 없었다.
기독교를 탄압하는 빌미로 성도가 성찬을 행하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했는데, 이것을 실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괴이한 집단으로 거짓 선전했고 호도된 일반 시민들도 격렬히 동조했다.
그럼에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실제 경험한 성도는 만인이 평등한 그 식탁을 포기하지 않았고,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갔다.
만약 당시 기독교가 내세 구원만 내세웠다면 그처럼 핍박받지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성경의 내용과 역사를 볼 때, 교회가 기득권을 옹호한다는 것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본질을 잃어버리는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교회는 본디 기득권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압제하는 상황이 심각해질 때 “No”라고 말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한국 교회는 태생적으로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다분히 내세 중심의 개인 구원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기득권층이 되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압제가 행해질 때 기득권의 손을 들어주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기도 했다.
현대인은 현실의 모순에 무기력하며 오히려 기득권과 야합하는 모습을 보이는 기독교의 모습에 깊이 실망했다.
코로나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이 많고 집단확진의 보도가 끊이지 않는 중에도 일부 기독교인이 그 의미도 모른 채 세뇌된 듯 종교행위를 반복하는 비이성적 행태에 질린 것 같다.
청년들의 이탈이 아주 심각하다.
현재 한국 교회는 과연 위에 열거된 구약의 예언에 대하여 깨끗한가?
교회가 믿는 믿음이 과연 죽어서 천국에만 가면 된다는 수준인가?
세상을 향해 회개를 외칠 것이 아니라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에 준 가치를 제대로 알고 믿고 살고, 그 다음에 전해야 한다.
뼈가 부러졌는데 반창고 붙이듯 구조적 모순은 모른 체하고 그 모순 속에서 고통 받으며 가난에 처한 사람들 구제하는 것이 복음으로 비쳐지면 안된다.
예배 열심히 참석하고 속상하면 부르짖으며 기도하며 묵묵히 참고 기다리다 보면 개천에서 용 나듯 어쩌다 성공할 수도 있고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는 요행을 성경적 가치관처럼 가르쳐서는 안된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교회 안팎으로 천명해야 한다.
코로나 상황으로 교회가 본질을 고민하는 시기에 놓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