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하나님의 선물’

한국 교계에서는 참 얄궂게도 방언으로 대변되는 ‘은사’는 참 혼란스럽다.
침례교단이면서도 장로교인 고신대학원에서 교의학으로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성민규 목사님이 ‘칼빈의 은사론’을 다룬 자신의 석사논문을 뼈대로 하는 책을 냈다.
성 목사님은 페이스북 친구로서 낮은울타리를 방문한 적이 있어 북토크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겉표지 색과 같은 계열의 옷을 맞춰 입고 참석했다.
전문신학서적인데 어떻게 북토크를 하며, 은사에 대한 인식을 알고 싶었다.

성 목사님은 청년기 때는 전병욱의 삼일교회와 극심한 은사주의로 이단논란이 있는 큰믿음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양극단의 아주 왜곡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셈이다.
미국의 침례교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기도 했지만 아쉬움에 고신대학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칼빈을 신봉하게 되었고, 칼빈의 은사론을 정리해서 학위도 받고 책으로 출간도 했다.

칼빈은 종교개혁자이고 탁월한 학자이지만, 시대의 아들이다.
자기 민족의 언어로 된 성경이 없어 거의 성경에 대해 무지한 상태의 중세 로마카톨릭은 은사나 기적에 대해 지금의 기도원에서 행해지는 일보다 더 극단적이고 미신적으로 행했을 것이다.
로마카톨릭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또한 사람들에게 자기 말로 된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적 가치로 사회의 규범을 만들며 사는 모범을 보이고 싶었던 칼빈으로서는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은사로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아쉬운 점은 사람들이 16세기 칼빈의 성경해석에서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칼빈 이후로 500년이 지나면서 많은 연구와 사회와 교회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칼빈의 해석만 변치 않는 기준처럼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베드로나 바울같은 사도도, 폴리캅같은 속사도도, 어거스틴같은 교부도 다 시대의 아들들이고 인간적인 약점이 있다.
오직 하나님만, 오직 성경만 변치 않는다.
그 하나님은 시대를 변화시키시며, 성경에는 시대에 따라 교회와 은사가 유연하게 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장로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며, 칼빈의 해석만 옳은 것이 아니다.

지난 500년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일하심에 대한 연구와 고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칼빈을 교조로 삼지 않고, 그를 기초로 더 성숙한 정리와 고백이 세워질 수 없는 것일까?
아마 천국의 칼빈도 이런 걸 원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