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과 신앙단상(1)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2020년 4월 11일 썼던 글을 발견했다.

1년 정도 다니던 프랜차이즈 미용실을 가지 않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프랜차이즈 미용실이 아닌 동네 미용실을 이용해 주자는 마음으로 보통 아주머니 한 분이 머리도 하고 샴푸도 하고 계산도 하는 미용실을 찾았다. 
평일에 두 군데를 갔는데 공교롭게도 한 곳은 정기휴일이었고, 한 곳은 내 머리를 손질하다가 아주머니가 넘어져 절뚝거리는 바람에 마무리가 잘 되지 않은 채 나왔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미안하다며 다음에 오면 잘 해주겠다는 말에 다음에 다시 찾아 갔으나 공교롭게도 휴일이었다. 
프랜차이즈 미용실은 담당자 비번은 있어도 문을 닫는 날은 명절 당일이 아니면 거의 없다. 
이번에 혼자 하는 미용실은 휴일이 정말 대중이 없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곳을 찾다가 ‘주일은 쉽니다’가 적혀진 미용실을 찾았다. 
역시 아주머니 혼자였는데 기독교인인 모양이었다.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갈 때마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기다리는 걸 싫어하므로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늘 가면 바로 깎을 수 있다. 

오늘도 역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안내 받은 하지만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으며 “부활절을 맞아 청순하게 깎아 주세요”라고 했다. 
이미 안경을 벗어 거울로 비친 아주머니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이내 앉은 내 머리 위로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부활절인데 너무 삭막한 것 같아요” 
그렇지, 
여느 때 같았으면 고난주간 내내 특별새벽기도회나 집회로 여러 차례 모였을텐데 교회당에 갈 수 없고, 내일이 부활절인데도 집에서 영상으로 봐야 할 분위기이니 삭막하게 여겨졌겠다 싶었다. 

그러나, 일순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갔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 날도 삭막하기 그지 없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무덤에는 로마 병정들이 지키고 있었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모이긴 했지만 들킬까봐 두려워 몰래 모여 있었다. 
주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기적으로 팔 일만인 주일에 주로 나타나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신 주일에 부활소망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박해가 심했기에 주일뿐 아니라 성도에게 하루하루는 삭막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함께하심을 누리며 매일을 부활생명으로 산 것이다. 
그들에게는 매주일이 부활절이었고, 매일이 부활절이었다. 

그런데 기독교가 공인되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부활생명으로 살아가고 부활소망으로 살아가는 힘이 약해졌다. 
왕과 국가 위에 교회가 있는 중세에 크리스텐덤이 이루어지며 더 심각해졌다. 
모임은 화려해졌지만 굳이 부활생명이나 부활소망을 사모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되어 버렸다. 

어릴 때부터 사순절,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 등을 지켰다. 
그 때는 그런 것들을 잘 지켜야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많이 달라졌다. 
교회 안에서의 모임이나 행사가 아니라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말 내가 부활생명을 가지고 사느냐, 부활소망을 가지고 사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임을 깨달았다.  

코로나 사태로 ‘삭막’해졌다. 
교회당으로 모이고, 집회를 하는 종교행위가 싹 빠지고 나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기대한다. 
성도들이 진짜 ‘부활생명’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부활소망’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고 찾게 되기를.  
삭막한 것이 은혜로 보인다, 감사하다. 

마스크를 벗은 지 1년이 되어 간다.
교회는 삭막함을 제대로 벗었을까?
이제는 생기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