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과 신앙단상(2)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2020년 4월 18일에 쓴 글을 발견했다.

처음 서울 노원구에 이사 와서 이발을 할 때 가깝기도 했고 선택의 실수를 그래도 줄일 수 있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미용실에 갔다. 
1년 정도 나를 맡았던 헤어디자이너가 일을 그만 두고 한동안 쉬려고 한다고 내게 알려 줬다. 
2018년 12월 미용실을 찾아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데스크에서 내게 어느 선생님을 원하시느냐고 물었다. 
원장님이나 다른 선생님들은 지금 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일을 배운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앳된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은 경험이 많아 보이는 다른 선생님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머리 길이만 대충 자르고 숱만 쳐주면 어차피 머리는 내가 만지기 때문이다. 
25년전 결혼식 때도 내 머리는 내가 만들었다. 
그녀는 자기 담당 고객이 하나 늘어나니 좋아했다. 
실은 우리 식구 여섯을 얻었다. 

그렇게 몇 차례를 만났을 때 내가 목사임을 밝혔다. 
머리를 깎는 일을 통해 교회 바깥의 사람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는 자신이 중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했다. 
왜 계속 다니지 않았냐고 물으니 당시 교회 목사님이 헌금과 관련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부모님의 마음을 어렵게 해서 그 때부터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고, 덩달아 자신도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다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이 직업을 가진 이상 어렵다고 했다. 
주말이 가장 바쁘고 이 미용실에서는 목요일 비번이라 교회를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회가 발전하며 소위 서비스직이라는 3차 산업에 속한 직종에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은 주말에 더 바쁠 수밖에 없다. 
전통적 주일개념이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교회를 더 멀게 느껴지게 하겠구나 싶었다. 
이런 직종의 사람들은 주중의 예배(예전에는 수요예배도 삼일기도회로 불렸다)나 기도회에 참여해도 주로 주일에만 행해지는 성찬이나 세례에 참여할 수 없다. 
만약 내가 교회를 개척한다면 당신같은 서비스직에 있는 사람들이 올 수 있는 날짜와 시간에 모이는 예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주일예배가 메인이고 주중에는 예전에 기도회로 불려지다가 어느새 예배로 불려지고 있는 모임이 아닌 서비스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일보다 가볍다고 여겨지지 않는 그런 예배 말이다. 
그녀는 환한 음성으로 “그럴 수 있어요? 그럼 가고 싶어요. 아는 사람들도 같이요”라고 했다.

담임목회를 할 때 성도가 자신이나 자녀를 위해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 받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안타깝게 여기며 위해서 기도했지만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자녀가 의료인이나 법조인이 되어 한동안 주일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그런 기도 요청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으로 옮겨달라고 기도해 드릴까요?” 했더니 농담이 지나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본다. 
나는 진담이었는데. 

서비스직인 직장도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일인데, 기독교인들이 모두 빠져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교회 바깥의 사람들 중 전통적 개념의 주일이 오히려 장벽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에 대해 교회가 눈을 뜰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현재로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면 직업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처럼밖에 들리지 않는다. 
접점이 무엇일까? 

교회 안에만 있을 때는 전혀 고민되지 않던 것들이 교회 밖으로 한번 나갔다 들어오니 전혀 다르게 보이며 고민되기 시작한다. 
본질을 흐리지 않으며 장벽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코로나 사태 덕분에 무엇이 벗어버릴 수 있는 껍질이며, 무엇이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알맹이인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낮은울타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