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이 심하게 가라앉을 때가 있다.
수도권에서 지낼 때 안정적인 생활환경과 크게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 늘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가 부산에 내려와서 정반대의 생활로 바뀌자 몸과 마음이 그 변화에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요즘은 그러면 나가서 뛰거나 걷는다.
주말을 좀 힘겹게 보내고 한글날 아침을 맞았을 때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이기대 산책로 걷기를 도전했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변화를 아주 거북해 하는 사람이란 걸 깨닫는다.
얼리어답터는 나와 정반대의 성향이다.
산책이나 달리기도 늘 가던 송정과 청사포만 가고 있다.
그래서 부산에 온 지 3년이나 되었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이기대를 한 번도 가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기대는 해운대와 태종대처럼 해변에 조성된 공원인데 산책로로 더 유명하다.
이기대 산책로가 좋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고 사진도 봤지만 그동안 가볼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내겐 익숙한 청사포와 송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라앉은 나를 위해 흐린 날씨였지만 도전하기로 했다.
지도에서 이기대를 검색해서 어느 노선으로 걸을 지 선택했다.
용호별빛공원에서 해안길로 오륙도해맞이공원까지 걸어갔다가 등산로로 돌아오는 노선을 정했다.
제1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용호별빛공원까지 걸었다.
용호별빛공원에서 광안대교와 해운대쪽을 봤다.
왜 사람들이 이기대, 이기대 하는 지 좀 알 것 같았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장관이 내 시선을 채웠다.
이기대 해안산책로는 잘 정비된 청사포-미포 블루라인파크나 내가 즐겨 달리는 송정해변의 평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작점에서는 평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흔들다리의 재미도 있었지만 이내 해안절벽을 따라 심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해야 했다.
해안산책로라고 했지만 실상은 험한 등산이나 다름 없었다.
차이라면 끊임없이 왼편에 보이는 해안절벽과 거센 파도소리가 이곳이 해안산책로라는 걸 일깨우는 것이다.
제주도 올레길 7코스에 보이는 주상절리도 보였다.
내 눈엔 밋밋한 7코스 주상절리 지역보다 이기대의 그것이 더 다이나믹하게 보였다.
게다가 깊게 들어와서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는 훨씬 거세 보였다.
좁은 구간은 교행이 불가했다.
관광객 일행을 만나면 그 일행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곳도 있었다.
또 앞에 속도가 느린 연세드신 분들이 있으면 마치 고속도로 정체 현상같은 것이 생겼다.
나는 무작정 걷기만 한 것이 아니다.
곳곳에서 바다와 수평선을 멍하니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실례합니다.” 또는 “먼저 지나가겠습니다.”라고 해서 지나쳤던 팀을 3번이나 다시 만나고 추월하는 일을 반복했다.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반환점으로 삼아 돌아올 때는 장산봉 등산로를 택했다.
등산로는 지도에 나와 있지 않았지만 공원에 안내된 지도판을 보고 움직였다.
10시 15분쯤 주차하고 걷기 시작해서, 다시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12시 30분쯤 됐다.
거리로는 9킬로미터 남짓, 걸음으로는 14000보 정도를 걸었다.
몸과 마음이 다운될 때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걸으면 왜 좋을까?
몸과 마음이 다운될 것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목적지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어디서 쉴까?
이런 생각들로 가득차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그렇게 두 시간 여를 걸으면 ‘해냈다’는 성취감이 또한 몸과 마음을 다독인다.
주차한 차에 앉아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회복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