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덕규 광야

1993년 2월 대학 교정을 나서는 내게 친구가 ‘하덕규 광야’ 카세트를 선물했다.
당시 나는 마라나타 싱어즈나 최덕신, 아니면 쏠티 시리즈를 즐겨 들을 때라 하덕규는 생소했다.
‘시인과 촌장’도 모를 때였으니 개발새발 글씨가 금세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친구의 선물이니 끝까지 들어야지.
첫곡의 제목이 ‘지난 날에게’였다.
보통 첫곡에 힘을 주게 마련이니 기대 속에 들었다.

웬걸, 노래가 아니라 시를 낭송하는 것 같았다.
귀가 솔깃해지는 아주 좋은 음성도 아니고, 낮은 소리라 분명하지도 않아 어느 순간에는 배경음악에 음성이 묻히기도 했다.

순간 “나는 돌아보지 않겠다”하는 대목에서 내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다시 가사를 눈여겨 보며 돌려 들었다.
외롭게 광야로 들어서 힘든 길을 가는 자에게 닥치는 유혹과 혼란, 그리고 그가 본 확실한 소망을 향한 결연한 의지가 그 짧은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가사는 28년 지난 지금에도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오늘 문득 그 카세트 생각이 났고, 혹시나 싶어 CD장을 살폈다.
카세트를 듣지 않은지 20년은 된 것 같은데 다행히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다.
그 가사를 다시 읽으니 지금의 형편과 겹쳐져 마음에 새롭게 와닿는다.

하덕규 광야 카세트 [사진 강신욱]
지난 날에게 

네가 마련해 준 신을 신고
이만큼이나 걸어왔다
너는 멀어진 기억의 숲속 어딘가에서
애잔한 모습으로
"내가 여기 있어요, 내가 여기 있어요"
라며 애타게 나를 부르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겠다

이제 슬프게 떠돌았던 잿빛 허무의 신을 벗고 
내가 걸어야 할 저 광야
이 새로운 눈물 너머로 꿈에도 그리운 약속의 땅 
저 황금빛 들판 눈 앞에 춤추는데
눈 앞에 춤추는데
눈 앞에 춤추는데 

그가 보았던 황금빛 들판이 내가 소망하는 그것일까?
당시 온실 속에 있던 나는 왜 그 가사에 꽂혔던 것일까?
28년 전부터 광야로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일까?

그가 들었던 그 음성이 나도 들린다.
“내가 여기 있어요, 내가 여기 있어요”
그에게도 얼마나 큰 유혹이 있었을까 가늠이 된다.

다시 되새긴다.
다시 다짐한다.
“나는 돌아보지 않겠다”

이어지는 두번째 곡은 ‘광야의 바람’이다.
그렇게 고귀한 결심을 하고 길 없는 광야를 걸어가건만, 그 광야는 도와주지 않는다.
오히려 세찬 바람만 불어온다.

그러나 그 길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광야로 떠난 목마른 양들, 울며 헤매는 양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할 그 광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