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 살 때 계절마다 한 번 정도는 공연장을 찾거나 연주회를 본 것 같다.
감사하게도 우리 부부를 기억하고 초청해 주신 경우가 많다.
간간이 찾아서 간 경우도 있는데, 모두 아내가 좋은 연주회를 소개해서이다.
나는 어떤 경우 연주자도 모르고 곡은 더 모를 때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냥 그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좋았고 어떤 때는 마음이 만져지는 것 같은 감동을 받기도 해서 연주회를 꾸준히 찾았던 것 같다.
그런데 2019년부터 2년간 음악회를 가지 못했다.
경기도에 살면서는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을 자주 찾았고, 간혹 바람을 쐬거나 기념품점을 구경하기 위해서라도 갔었다.
오히려 서울에 살면서 시간도 형편도 되지 않아 종종 아내와 마주 보며 “우리 서울 사는 것 맞아?”라며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부산으로 이사왔으니 이제 그런 기회가 더 드물 것 같았다.
우연히 인터파크 앱을 보다가 ‘백건우 리사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백건우를 잘 모른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인데, 배우 윤정희씨의 남편이라는 것 정도.
그런데 최근 매스컴에 윤정희씨 치매에 관련하여 백건우씨에게 아주 불편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런데 피아노 리사이틀을 하다니.
아무리 약속된 것이라지만 예민한 예술인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연주를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 70대 중반의 연주자가 2시간 가까운 연주회를 어떻게 끌고 나가는지 보고 싶기도 했고, 앞으로 그의 연주회를 현장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겠다 싶어 아내와 같이 가보기로 했다.
게다가 티켓 가격이 평소 서울 공연장에서 그 정도 좌석의 1/4이라는 점도 있어서 거리가 멀었지만 감내할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공연장 좌석은 앞뒤좌우로 한 칸씩 띄어 앉았는데, 오히려 공연을 관람하기엔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옆사람 신경을 쓰거나 타인의 냄새를 맡지 않아도 돼 좋았다.
공연좌석 배치는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다 싶다.
객석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연주회가 시작됐다.
백발의 백건우씨는 예상보다 체격이 컸다.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피아노에 왼손을 얹고 객석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돌아서 피아노 앞에 앉아선 뜸들이지 않고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슈만의 곡들이었는데, 나는 슈만도 익숙하지 않고 그의 곡들은 생소한 수준이다.
연주회 곡들도 나름 슈만의 대표적인 곡이 아니라 소품 수준의 곡이라 다른 관객들도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한 곡 안에서 잠시 쉬는 것인지 한 곡이 마무리 되고 다른 곡으로 넘어가는 것인지 오리무중이었다는 뜻이다.
환언하면 박수를 치는 시점을 몰라 서로 눈치를 보는 관계였다고나 할까.
1부가 끝나고 백건우씨가 일어서기까지 아무도 박수를 치지 못했다.
휴대폰이 울리고, 우산이나 안내책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도 해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정작 연주자인 백건우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연주를 했다.
모르는 곡들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연주에 점점 빠져들었다.
아주 청명한 햇살이 부서지는 계곡 아래 물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리기도 했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거센 파도와 함께 몰아치는 천둥같이 들리기도 했다.
따뜻한 햇볕 아래 뜨개질을 하던 할머니가 조는 것과 같은 느낌(그래서 내 옆 사람은 그렇게 고개로 방아를 찧으며 졸았었나?)을 주기도 했다가, 웃통을 벗은 젊은이가 곡괭이로 밭을 일구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압권은 여운이었다.
피아노 소리가 그렇게 오래 갈 줄 몰랐다.
마치 큰 종을 친 것처럼, 하지만 소리는 부드럽게 한 음이 길게 이어지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속으로 ‘대단하다, 거장이구나’ 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으로 연주된 ‘유령 변주곡’이 좋았다.
환상과 환청에 시달린 슈만의 마지막 곡이라는데, 전혀 유령스럽지 않고 오히려 밝은 느낌을 받았다.
이 곡에서도 백건우씨가 마지막 음을 별로 세지 않게 때렸는데 그 여운이 오래갔다.
숨을 죽이고 듣고 있는데, 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멀리서 한 관객이 박수를 쳐버렸다.
감동을 많이 받은 건지, 빨리 가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많이 아쉬웠다.
거장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도 박수를 치는데, 앵콜곡이 궁금해졌다.
다른 관객들의 이야기가 들리는데 내심 익숙한 앵콜곡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백건우씨가 다섯 번이나 무대 뒤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반복되자 ‘아, 앵콜곡이 없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그의 모습이라도 담자 싶어 얼른 폰을 켜서 급히 그의 모습을 담았다.
그가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땡큐’하는 그의 입이 보였다.
그리고는 무대로 들어가 그는 다시 나오지 않았고 조명이 밝아졌다.
앵콜무대에 신경을 쓰는 연주자도 있지만 그는 연주회에 모든 것을 쏟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조금 황당하다는 듯 말을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나는 한참 더 앉아 있었다.
현재로선 피아니스트로 65년을 살아온 그의 마지막 연주를 본 것이 아닌가.
그의 음악과 인생과 연주의 여운을 느끼고 싶었다.
나도 내 길을 그렇게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