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도로 개종하는 절차로 형식적으로는 교회에 등록하는 과정이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을 ‘회개’라고 한다.
‘회개(悔改)’는 말 그대로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의미이다.
회개해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한국에서 일천만 명에 이르렀는데 사회는 전혀 거룩해졌다는 느낌이 없었다.
결국 사람들이 실망하고 고개를 돌리고 기독교인의 숫자가 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다음세대의 이탈이 심각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부모와 교회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염증을 느낀 것이 가장 크지 않을까 짐작한다.
예전 교회나 성도의 이미지가 예배당에 가서 울면서 기도하는 것(그러고 보니 요즘은 울지도 않는다.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성도를 본 적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목사는 더더욱)이었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는 “기독교인들은 울기만 하고 삶은 똑같다”는 비판을 했고, 강단에서도 “뉘우치는 ‘회(悔)’만 있고, 삶을 고치는 ‘개(改)’가 없다”는 자성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개(改)’가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나 금요기도회까지 열심히 참석하고, 성가대원이나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열심히 봉사하거나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는 정도이다.
교회당은 일주일 내내 사람으로 북적이고, 여러 가지 부서가 생기고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게 됐다.
그래서 사회에 변화가 생겼는가?
사회는 더 각박해지고, 교회는 자기들끼리만 열심히 모이는 이기적인 집단처럼 보이게 됐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회개를 했는데, 왜 변화가 없을까?, 아니 더 나빠지는 것같은 느낌일까?
회개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약화된 것일까?
아니다.
사람들은 거짓회개를 하고, 교회는 거짓회개를 용납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눅 3:8)고 외쳤다.
그 외침에 찔린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 3:10)라고 물었을 때, 세례 요한의 답에 주목해야 한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례 요한의 대답에는 어떤 종교적 색채나 요구가 없다.
예배에 참석하라거나 기도를 열심히 하라거나 성경을 알아야 된다거나 직분을 맡아 교회에 대한 책임을 완수하라는 내용이 전혀 없다.
오히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 40:4,5)라는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라는 요구이다.
골짜기는 노예같은 낮은 신분을, 산이나 언덕은 왕족이나 귀족같은 높은 신분을 의미한다.
인간의 죄성이 만들어낸 신분과 그에 따른 억압이 사회 구조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작은 피조물이요, 구원이 필요한 죄인일 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그분을 경외하는 자는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지는 이미지로 표현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다만 그가 맡은 일을 조화롭게 하는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당시 세금을 과다부과하여 로마에 할당량을 바치고 나머지를 착복하는 세리가 와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에 대해 물었다.(눅 3:12)
세례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답했다.
십일조를 빼먹지 말라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십일조를 하던 사람이면 십일조가 줄어드는 요구를 한 것이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목사가 있을까?
당시 경찰의 역할까지 감당했던 군인이 와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었다.(눅 3:14)
세례 요한은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답했다.
당직할 때 말고는 주일 예배를 빼먹지 말라가 아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권력자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목사가 있을까?
세리는 재물을 가진 자, 군인은 권력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회개는 재물을 가진 자나 권력을 가진 자가 예배당에 열심히 나와 충성스런 멤버가 되고, 필요할 때 교회의 힘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압제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회개요구 메시지에는 종교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
이것을 처음 변질시킨 것이 로마제국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교회가 심각한 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라 하겠지만, 기독교인 황제를 둔 사회에서 일어날 일은 뻔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회개라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밀려드는 개종자를 세밀히 점검할 수 없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390년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젠 공무원이 되려면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가능하게 됐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도 고급 관료가 되려는 권세자를 위해 거짓 세례증서를 발급하는 일도 벌어졌다.
교회는 특권을 누리고 결국 변질됐다.
로마라는 거대 사회도 타락과 몰락의 길로 걷게 된다.
한국 교회가 이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한국 교회는 고도로 성장하는 사회 속에서 재물을 가진 자가 되고 권력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친 부분이 많다.
그러나 부도덕하게 그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에서도 부도덕을 행하면서도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한다면,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지 않더라도 헌금을 잘 한다면, 아니 그냥 와주시기만 해도 “우리 교회에 이런 영향력있는 사람도 온다”라는 식의 자랑으로 삼았다.
그래서 지금 한국 교회에 남은 것은 현재 국민의 혐오집단 중 하나라는 오명이다.
교회가 주님의 교훈에 붙어있지 않으면 원둥치에서 꺾여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라는 말씀이 떠오르는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한국 교회가 돌이켜서 종교적 형식만을 따르는 가짜 회개를 버리고, 회개에 합당한 삶이 따르는 진짜 회개를 가르치고 요구해야 한다.
신분은 없지만 차별이 여전한 사회 구조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더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가짜 회개를 버리고, 프로테스탄트(저항자)라고 불렸던 신앙의 선배들을 따라 구조의 부조리를 뛰어 넘어 손해와 포기가 반복되는 성경적 가치의 삶을 사는 진짜 회개를 가르쳐야 한다.
아직도 성도가 몇 명이라는 둥, 한 해 예산이 얼마라는 둥 이따위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목사나 성도를 포함한 교회가 정말 ‘진짜 회개’를 해야 할 때이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삶의 가치와 도리로 회개하는 것, 그것이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