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상급

천국에 가면 상급 곧 보상을 받기 위해 이 땅에서 헌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일까?

이 땅에서는 넓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도 있고, 좁고 불편한 집에 사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당연히 넓고 좋은 집을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영원히 산다는데 천국에서까지 좁고 불편한 집에서 영원히 산다면 과연 즐거운 천국일까?
그래서 목사 중에 천국에서 더 넓고 좋은 집에 살기 위해 이 땅에서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기엔 천국을 성경이 말하는 천국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땅에서 통용되는 왜곡된 가치관과 욕심과 보상심리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가 숨어있다.

천국에 가면 면류관을 받는다고 한다.
금 면류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등.
어떤 면류관이 가장 높고 귀한 면류관일까?
이 땅에서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서열을 매기고, 줄을 세운다면 그곳이 과연 천국일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 의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각각 다르게 주어진 달란트가 있다.
남들보다 더 나은 보상을 위해 과하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맞게 살면 예수님은 모두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똑같이 불러주시고 칭찬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요한복음 14장에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하셨다.
천국에서 내가 살 집을 위해 이 땅에서 면적을 넓히는 수고를 해야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다고 약속하셨다.
‘거처’라고 해서 천국에 가면 문 닫고 들어가고, 옷 벗고 편하게 몸을 기댈 소파가 있고, 넓직하고 쾌적한 화장실이 몇 개씩 있는 집을 연상한다면, 예수님의 재림 때 우리가 입게 될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신앙과 배치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는 분명히 상급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그 상급을 이 땅에서의 보상의 개념으로 기대한다면 오히려 실망할지 모른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구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해주신 말씀이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유목생활을 하는 아브라함에게 아쉬웠던 ‘땅’이나 간절했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바로 상급이라고 하셨다.
진정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온전히 고백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자라면, 이 땅에서는 누려보지 못했던 화려한 면류관이나 큰 집을 영원히 소유하고픈 욕심에 천국의 본질과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복음을 왜곡시키지 않을 것이다.
천국에서의 넓은 집이나 면류관이나 새로운 계급을 바라지 않고 오직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그것만을 바라는 신앙일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정 바라는 상급이 있다면 예수님 자체일 것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때 예수님이 그동안 수고했다고 면류관을 주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찬송가 제339장은 이미 천국에서 일어날 일을 노래하고 있다.
아래 악보에서 2절과 3절 가사를 보라.

천국은 상급에 신경을 쓰고, 상급을 비교하고, 이 땅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헌신할걸’이라며 후회하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