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주의보가 연일 발효되는 무더위지만, 낮은울타리의 다른 성경공부는 물론이고 심지어 주일예배도 방학이지만 세례교육만은 계속되고 있다.
내 고집이나 욕심이 아니라 비기독교인이었다가 이제 막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하게 된 분의 기독교 신앙을 배우려는 열정이 크기 때문이다.
무더위 중에도 김해에서부터 낮은울타리까지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오겠다고 하길래 차라리 운전으로 한 시간 걸리는 내가 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해서 계속 김해의 한옥 카페에서 모임을 하고 있다.
이번에는 ‘복음의 성격’에 대해 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또는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말이 있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하고, 마음을 쏟으면 결국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은 이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세상의 철학과 종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철학과 종교도 결국 자기가 이르고자 하는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기독교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복음은 ‘도달’이 아니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사람이 전적 타락, 전적 무능력의 상태라고 한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내려오셨다.
예수님이 내려오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래서 복음은 은혜이고 선물이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나 철학과 방향이 정반대이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쉽게도 은혜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 중에도 여전히 ‘도달’의 의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대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새벽기도를 빠진 적이 없다.”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다. 몇 번이나 썼다.”
“주일학교 교사 또는 성가대를 몇십 년째 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구원을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혈통이나 자신의 열심에 의지하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교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서 55년을 믿은 나나 이제 1년째인 세례교육 대상자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이야기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포도원에 일꾼들이 일하러 왔는데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에 일하러 온 사람에게 똑같은 돈을 주니까 아침부터 일하러 온 사람이 불평했다는 이야기도 읽어봤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복음을 은혜와 선물로 받지 못하고 남들과 비교하면서 복음을 자신의 공로나 보상으로 여기려는 사람들의 패착이라고 했다.
복음을 은혜로 받지 못하면 순식간에 원망과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복음은 은혜요 선물이란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