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 과학, 그리고 상식

4년 전 ‘초월을 향하는 과학’이란 제목으로 두 번에 나눠서 썼던 글인데, 하나로 합쳐서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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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超越)’은 경험이나 인식의 범위 바깥에 있는 것을 말한다.
내게는 수학이나 과학이 초월이다.
대학에서 이과 계열의 전공서적을 보는데 읽을 수도 없고 전혀 공감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내게는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성향이라 고등학교 때 수학과 과학 과목시간은 내게 고문이었다.
정말 선생님들의 몽둥이 덕분에 억지로 통과했다.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 다니는 내내, 아니 지금도 내가 이과로 가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으로 여긴다.

학부 때 간혹 이과 계열 학생들이 법대 과목을 자유선택과목으로 수강하러 온 적이 있다.
그들은 거의 한자로 도배가 된 법학전공서적을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
법학도들은 약자로 쓰기도 하고 영어 필기체처럼 날려 쓰기도 하고 또 알아보는데 그들에게는 거의 암호수준이다.
그들에게는 법학이 초월일지도 모른다.
도시생활을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농사를 짓는 어르신들의 삶은 초월일 수 있다.
같은 과학을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기계공학과 생명공학은 서로에게 초월일 수 있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스마트폰의 운영체계나 반도체의 설계는 대부분에게 초월이다.

이처럼 초월의 경계는 사람마다 다양하다.
누구에게는 전혀 이를 수 없는 수 없는 초월이 누구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일 수도 있다.
어릴 때 세계여행백과 같은 책을 보면서 뉴욕의 타임스퀘어나 브로드웨이는 어쩌면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 멀게 느껴진 곳이었다.
천국은 죽으면 가겠지만 생전에 뉴욕에 가볼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 몇 번이나 가봤다.
브로드웨이를 걷고, 극장에서 뮤지컬도 보고, 타임스퀘어에서 스파이더맨과 배트맨 사이에서 사진도 찍었다.
어릴 때의 초월이 이젠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남미나 아프리카는 여전히 초월이다.

사람은 개인이든 인류공동체이든 각각의 초월을 동경하며 초월을 향해 나아간다.
어떤 사람은 너무도 작은 미지의 세계로, 어떤 사람은 너무도 큰 미지의 세계로.
전에는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세계로 나아간다.
그 보편적인 방법이 과학이다.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통해 인간은 초월을 상식으로 만들어간다.
수천 년간 토끼가 절구를 찧고 있다고 믿었던 초월적 대상인 달에 어느 날 갑자기 발을 딛고 토끼뿐 아니라 어떤 생명체도 살지 않는다는 걸 상식으로 만들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초월을 상식으로 만들 수 있을까?
보편적으로 자연과학을 뜻하는 ‘과학’의 사전적 의미는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인 지식이다.
과학의 대상을 보면 처음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경험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가시광선 바깥의 적외선과 자외선을 알게 되고, 방사선과 자기장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전에는 보이는 것만 연구했지만 요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연구한다.
전에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소리를 연구했지만, 언제부터인지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인 초음파를 알게 되고, 초음파를 내고 듣는 존재들의 소통을 연구하게 됐다.

우주과학은 아직 가장 가까운 행성인 화성이나 금성에도 발을 내딛지 못한 인간의 입장에선 거의 초월에 가깝다.
100억년 전의 빛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존재를 더듬어 추측하는 수준이다.
우주 공간에 뭔가 있기는 있는데 도대체 실체를 알 수 없는, 그래서 ‘블랙홀’이라고 이름붙이기만 했던 존재가 있었다.
한참 나중에야 블랙홀이 빛까지도 빨아들이는 엄청난 질량의 아주 색다른 천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런 계속되는 과학적 발견을 통해 몇십 년 전 우주의 크기가 10만 광년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사람들의 초월을 우리는 상식으로 갖고 있게 됐다.
계속해서 초월을 상식으로 만들어가는 대표적 분야이다.

작은 미지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1000분의 1미터인 밀리미터도 작은데, 내가 초등학교 때 1백만분의 1인 마이크로미터라는 단위를 처음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10억분의 1미터인 나노미터의 세계를 직접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전에는 초월이었던 분야인데 지금은 초등학생도 상식이다.
이제 작은 것에 대해 좀 안다 입을 떼려면 1조분의 1미터인 피코(pico), 1천조분의 1미터인 펨토(femto) 정도는 언급해야 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1백경분의 1인 아토(atto), 1십해분의 1인 젭토(zepto)를 연구한다.
그렇게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초월을 상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초월일 뿐이다.
이처럼 과학적 발견은 상식의 경계를 계속 넓혀 가고 있다.
달리 말하면 과학이 초월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위 종교 분야를 초월이라고 한다.
과학은 자연을 연구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초월인 종교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자연과 초월을 나누는 방식은 헬라식이다.
초월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사물을 이해하는 한 방식일 뿐이며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히브리식이나 동양의 방식은 통합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실은 굳이 종교적 영역이나 철학의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일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것에 의해 훨씬 더 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인식한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사랑에 울기도 하고, 사랑에 웃기도 한다.
현대인의 대부분의 질병의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굳이 상기한 이분법적 방식을 택한다면 아직 ‘신(神)’이나 ‘영(靈)’은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연과학으로도 초월이다.
하지만 그 이분법적 방식을 택하더라도 위에서 본 것처럼 초월의 경계는 상대적인 것이고, 그 초월의 경계라고 생각했던 것조차 계속 무너지며 상식이 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종교적 영역도 언제까지나 이분법적 초월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대부분 많은 연구를 통해서 자연법칙을 발견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처럼 역시 우연한 기회로 종교적 초월에도 한 걸음 다가가는 발견을 하길 기대한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접근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신앙 자체에 대한 접근은 어려울 것 같다.
사랑에 빠지면 왜 사랑에 빠졌는지 증명할 수 없고 설득할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이 눈에 콩깍지가 덮혔다고 하듯,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역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하든 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듯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매력이기 때문이다.
과학 등 세상 어떤 학문이나 사상이 이를 수 없는 영역이라서 더 매력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