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서가 필요하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정리한 것이 신앙고백이다.
대표적으로 사도신경이 있다.
믿음의 선진들이 치열한 역사 속에서 남긴 참으로 귀한 신앙유산이다.

종교개혁 후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사도신경과 다른 점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와 함께 허락된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가 포함되어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작성된 신앙고백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사회를 전제하므로 교황과 교회가 반성경적으로 행하는 것을 지적하며 그 시대의 흐름과 다르게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각 나라별로 그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먼저 루터파 교회의 입장을 정리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가 만들어졌고, 이어 신앙과 함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고백하는 장로교회(개혁파)의 신앙고백서들이 각각 채택됐다.
갈리아 신앙고백서(프랑스, 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스코틀랜드, 1560), 벨직 신앙고백서(네덜란드, 1561),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독일, 1562),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스위스, 1566) 등등.
각 나라별로 기존 종교세력과 연관된 정치적, 사회적 여건이 조금씩 달랐고 그에 따라 성도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개혁의 풍파가 조금 지나간 약 100년 뒤의 영국에선 치열했던 교황청과의 싸움보다 세상 정부와 교회와의 관계를 다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영국, 1648)를 채택했다.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완결된 것이 아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 들어서도 신앙고백서는 작성되었다.
수백 년 전과 다른 시대적 여건 속에서 교회와 성도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란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인종주의, 전쟁, 가난, 인간관계 등 현대적 문제를 다룬 미국 장로교 신앙고백서(1967)가 작성되었고,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네덜란드 계통의 교단 중심으로 ‘화해와 일치’를 언급한 벨하 신앙고백서(1986)를 채택한 예가 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선교 역사가 150년이 되었고, 우리의 역사와 당면한 현실은 서양의 그것과 결코 같지 않다.
그러나 신앙고백서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성도로서 이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라는 질문으로 신앙고백서를 보지만 현재 우리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교황권을 언급하는 내용을 보며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의 내용은 바뀔 것이 없지만, 기독교인이 소수인 한국의 형편에서는 수백 년 전 기독교 사회를 전제로 작성된 다른 나라의 신앙고백서가 중세 유럽의 옷을 입은 느낌이다.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배우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전혀 생각하거나 토론하지 않았던, 그래서 과거의 사실은 배웠지만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배우지 못했던 학창시절 역사 시간의 씁쓸한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사실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런 환경에서 이런 신앙고백서를 만들고 이렇게 살았다’를 배우며 가슴이 후끈하긴 했지만, 그래서 같은 내용을 믿는 우리는 현재 우리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거나 토론하지 못했다.
사역하느라, 아침저녁으로 봉고 모느라(나는 아니지만 당시 대부분 신학생 전도사들이 나중에 부목사가 되어서까지도 이 일에 탈진할 정도로 몰두했다) 바빠서.

그러니 목사마다 아전인수격으로 가르친다.
그나마 성경해석은 좋은 주석을 찾아보면 된다고 하지만 오늘날 훨씬 복잡한 정치와 사회의 문제 속에서 살아야 할 성도를 향해 ‘이렇게 사십시오’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확실한 근거와 신념도 없거니와 어떤 구설에 오를까 두려워 한다.
그러니 우리나라 단군이나 삼국의 시조인 주몽, 온조, 박혁거세와 동시대의 성경이야기에 기복신앙을 얹는 수준을 벗어나기 힘든 것 같다.
그것만 신앙인 줄 아는 기존 교인들이야 그 맛에 길들여졌지만, 불신자들은 왜 이런 요행을 바라는 허황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지 어이가 없고, 믿는 부모를 둔 자녀들마저도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신학교 교수님들이나 유명하신 목사님들이 정말 한국 교회와 미래를 걱정하신다면 ‘한국 신앙고백서’ 하나 만들어 주시면 좋겠다.
입장 차가 커서 ‘한국’이 어려우면 ‘한국 장로교 신앙고백서’라도.
코로나를 맞아 더욱 쇠퇴해 가는 한국 교회나 후배 목회자들이 다급히 부흥(?)의 길을 찾느라 “응답하라 1988″을 외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