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아프셨을까?

수해로 큰 피해를 입은 경남 산청의 민들레공동체에서 청년과 자원봉사를 했다.
폭염 중에 진흙으로 엉망이 된 창고에서 침수된 물건을 꺼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카트가 없기도 하거니와 있어도 소용이 없는 작업환경이었다.
아가리까지 가득찬 들통을 손가락으로만 지지한 채 미끄러운 바닥과 경사로를 거쳐 바깥으로 꺼내야만 했다.
이미 옷은 진흙이 묻었고, 경사로에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기도 했고, 손가락보다도 허리가 너무 아팠다.
나도 모르게 “이씨~”가 튀어나왔다.
같이 일하던 청년이 피식 웃었다.

“왜?”
“목사님이 인상쓰면서 ‘이씨~’하는 것 처음 봐서요.”
“그래? 미안하다. 나도 사람이라 너무 힘드니까 그냥 튀어나오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자원해서 오신 거잖아요?”
“응, 내가 자원했지. 이 일이 요긴하니까.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야. 손가락이 저리고,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니까 절로 신음이 나오는 거지.”

비신자인 청년에게 예수님의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줄 모르셨을까?”
“아니요.”
“맞아, 다 알고 오셨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을 거라고 미리 말씀하기도 하셨어. 그렇다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상하던 그게 왔구나’하고 태연하게 죽으신 건 절대 아니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그린 성화를 보면 예수님은 너무도 평화로운 표정이라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같아.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이기도 하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거든.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어떻게 그렇게 편안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겠어? 못이 박힐 때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매달려 있을 때는 경련을 일으키고, 끊임없는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셨을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니 비명도 지르고 다 하네.’라고 조롱한 거지. 예수님은 자원해서 몸으로 마음으로 비참하고 외롭게 죽으신 거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래서 의미가 있고 진짜인 거지. 태연하면 희생이 아니야, 신음이 나와야 진짜 희생이지”
“그렇군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