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을 믿을 때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사람들의 의문이 시작된다.
예수님이 위인인 것은 알겠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범한 죄가 없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 신자들이 범죄하면 회개한다고 하는데,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지은 죄를 고백하면 죄가 없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범죄에는 여러가지 양상이 있다.
첫째, 절도나 명예훼손처럼 적극적인 행동이나 말로 타인에게 재물이나 인격에 피해를 주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범법자가 법으로 처벌을 받는다.

둘째, 적극적인 행동이나 말은 없지만 음욕이나 탐욕처럼 혼자서 마음으로만 범죄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처벌받지 않는다.
다만 양심으로 괴로울 뿐이다.
물론 양심으로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셋째, 사회제도나 구조적으로 약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부조리에 힘들어하면서도 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죄인 줄 모른다.
법이 바뀌지 않는 한 처벌은 없다.

넷째, 하나님을 온 우주에 유일하신 한 분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은 경우이다.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면 패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첫째 경우만 처벌하고, 간혹 셋째 경우도 처벌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 가지 모든 경우를 죄로 여기고 처벌하신다.
성경에 명시된 대로 죄의 대가는 사망이다.
첫째나 둘째같이 개인적인 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고, 셋째의 경우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패망을 보면 알 수 있다.
넷째 역시 실락원의 이유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을 회복할 지혜와 능력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회복할 길을 여셨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 아니라 한 인격이다.

하나님이 동정녀의 몸을 통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육신의 한계 속에서 삶을 겪으셨다.
인생의 생사와 고민, 굶주림, 고통, 슬픔, 아픔, 모욕, 멸시 등등 사람이 겪는 것을 똑같이 겪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

하나님은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 밀림 속 일자무식인 사람과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차별없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로 ‘믿음’이란 걸 택하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사죄하신 것을 믿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유일한 용서의 길이다.

기독교는 용서가 아주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하나님이 인심쓰듯이 그냥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이 책임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대신 그 책임을 지신 것이다.
그래서 대신 그 책임을 졌다, 곧 죽음을 당했다고 해서 ‘대속(代贖)’이라 하고, 죄값이 치러졌다고 해서 ‘속죄(贖罪)’라고 한다.

누구에게는 너무 쉬운 용서 받는 방법이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용서 받는다고 이해되지 않는 방법이다.
아무 것도 행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흉악한 범죄자들도 믿음으로 그냥 용서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흉악한 범죄자들을 그냥 무죄로 여긴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들은 법에 의해 처벌 받아야 한다.
다만 그들이 죄를 진심으로 깊이 뉘우치고 “저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라는 마음으로 자기 같은 죄인도 용납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귀의할 때 하나님이 그 죄를 처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밀양’의 어린이 유괴살인범처럼 혼자 믿고 혼자 마음의 평안을 얻는 그런 식의 용서는 아니다.
먼저 사람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옳다.
성도를 핍박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바울이 평생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독일과 다른 일본의 태도는 너무 아쉽다.
하나님의 공의는 구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