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과학, 문학, 예술

보통 과학은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문학, 예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본다.
그에 반해 신학은 인간의 삶을 신에게 종속시켜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하고 위의 세 분야와 충돌한다고 여긴다.

나는 이 네 가지 분야를 이렇게 정리한다.
네 가지 분야는 인간을 위해 모두 필요한 것인데,
신학은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과학은 일반계시인 하나님의 피조물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문학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정서를 언어로 표현한 것이고,
예술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정서를 비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과학과 충돌하지 않으며, 문학이나 예술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교부 터툴리안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했다.
아테네는 학문과 예술의 도시이고 예루살렘은 신학의 도시이다.
터툴리안은 신학과 다른 분야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으로 봤다.
기독교 박해가 있던 2세기 무렵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라 본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라고 했다.
신학대학원에서 여러 사람을 통해 종종 듣기도 했다.
그가 정확히 무슨 의미로 말했는지 모르지만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데 신학이 우위에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신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자부심을 가지느라 그런 표현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위와 같은 관점이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신학이 모든 학문과 분야의 우위에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정서를 표현한 문학이나 예술을 교회의 이름으로 죄악시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만 과학으로 신존재증명을 하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피조물로서 피조물을 연구하는 과학이 창조주의 실태를 파악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 면에서 신학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해서는 부족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온 구원의 원리로 세상의 모든 질서나 자연의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도 무리수이다.

지금은 기독교 박해가 있는 시대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다.
역사를 교훈삼아 각 분야가 나름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분야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인간의 삶과 정서를 풍요롭게 해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