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정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오는 바람에 올초 둘째가 2학년 1학기가 시작하기 전 지낼 곳을 알아봐야 했다.
마음으로는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이 딸린 원룸이라도 얻어주고 싶었지만 형편상 보낼 수 있는 곳은 고시원밖에 없었다.
학교가 가까운 신사역 주변을 돌아다니며 고시원을 찾는데 하나같이 1층에는 식당, 술집, 편의점 같은 가게가 있었고 그 위에 고시원이 있는 구조였다.
밤늦게까지 얼마나 시끄러울까 생각하면 도저히 그런 곳에 아이를 두고 싶지 않았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빌라같이 생긴 고시원을 발견했다.
식당이나 주점이 없는 외딴 골목 안쪽인데다 1층은 필로티 구조로 주차장과 사무실이라 시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화강암으로 처리된 외관이 깨끗한 점도 좋았다.
그러나 고시원은 고시원이다.
방으로 들어갔더니 입을 떼기가 미안할 정도로 좁았다.
몸을 돌리기에도 불편하도록 좁은 공동샤워실과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고시텔’이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텔’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였다.
품에 있던 아들이 어느새 훌쩍 커서 따로 살아야 되는 형편이 되었는데, 한 학기를 보낼 짐을 놓을 곳이 없을 정도로 좁은 곳에 두고 오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아내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라도 아내나 둘째를 위로하고 싶었다.
아들을 고시원에 두고 왔을 때 이 땅의 ‘청년의 삶’의 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에고치같은 좁은 공간에서 20대의 처음을 시작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을까?
적어도 나비 이상을 꿈꾸며 매일을 다짐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을까?
결심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의 벽과 외로움에 안그래도 좁은 방에서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루를 마치고 누웠을 때 절로 나오는 한숨을 담기에도 모자란 방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을까?
금방 잠이 오지 않아 눈이 아프도록 폰을 보거나 축축해지려는 자정 넘은 밤거리를 정처없이 걷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을까?
전혀 다른 출발선에 있는 소위 금수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흙수저인 자신을 술이나 푸념으로 달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을까?
무엇보다 몇 년만에 꿈을 포기하고 고시원을 자신의 세상으로 받아들인 청년들이 얼마나 많을까?
내 아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이 땅의 청년들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