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구원받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린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 같은데
구원을 받았는지 확신도 없고, 기쁨이 없는 것만 확실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못 믿는 것 같고,
구원받지 못한 것 같아서 교회에 다니면서도
불안한 경우가 많다.
예배나 집회에 참석해서 새로운 깨달음이 있거나
마음이 뜨듯해지면 구원받은 것 같은데,
일상으로 돌아와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다시 구원이 불안해진다.
노아는 세상의 죄악에 빠지지 않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 칭함을 얻었다.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신다는 계획을
노아에게만 알리셨고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다.
노아는 많은 사람들의 조롱중에도 순종하여
산위에서 오랜 시간동안 방주를 만들었다.
이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칭찬받아 마땅하다.
드디어 방주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산 위에 방주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놀림감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란다, 그래야 안전하단다.
아무 일도 없는데 가족들과 방주 안으로 들어간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고도 조롱을 막아줄 것 같은 문은 닫히지 않는다.
다른 일로는 갈등이 있었던 사람들도
방주 앞에서 똘똘 뭉쳐 노아를 험담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아주신다.
기적이다.
드디어 이제부터 인생역전으로 본격적인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인가?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고,
땅에서 물이 솟아오르며 물이 차오르자 사람들이 방주로 몰린다.
그러나 한 번 닫힌 방주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사람이 열거나 닫을 수 있는 문이 아니다.
방주의 문을 여닫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
노아를 조롱했던 사람들이 뉘우치고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외친다.
우레같은 물소리에 사람들의 소리는 점점 잦아든다.
그들이 외침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 둘씩 죽어가기 때문인 것을 노아도 안다.
자기를 조롱하던 사람들이 다 천벌을 받았기에 노아는 통쾌했을까?
물이 더 차올라 방주가 떠오른다.
방주에는 키도 없고, 노도 없다.
방향이나 속도를 노아가 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방주가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바깥 사정은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노아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니까 노아는 기뻤을까?
여전히 비가 내린다.
여전히 배가 흔들린다.
하나님은 비가 언제 그칠지,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 주지 않으셨다.
방주를 역청으로 발랐기에 물이 새어 들어오지는 않지만
방주 안의 냄새나 습기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제한된 식량으로 그 많은 짐승들을 먹이며
언제까지 지내야 되는지 알 수 없다.
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날라 주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그 놈들이 싼 것을 치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 바깥이 밤인지 낮인지도 잊었을 것이다.
과연 구원의 방주를 탄 노아는
유람선을 타듯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비가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지니
안심이 되어 구원의 기쁨을 누렸을까?
창을 열고 보았을 때
세상을 가득 덮고 있는 물만 보이는데도 기뻤을까?
잠시 쉴 때나 잠을 잘 때는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잘 수 있었을까?
자신을 조롱했지만 그래도 친척이고, 그래도 이웃이었던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방주 안에서는 부부사이나 부모자식간이나
고부간이나 동기간에 화목하기만 했을까?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염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염려가 있다고 예수님을 잘못 믿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으면 늘 기쁜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기쁘지 않다고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염려가 많고, 구원을 받아도 괴롭다.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구원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구원의 기쁨은 평면적이지 않다.
이 복잡한 것을 솔직하지 못하게 단순도식화시켜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불안에 빠진 성도들은 다른 교인들을 만날 때
약한 믿음을 들킬까봐 가면을 쓴다.
구원받은 이후에는 염려하지 않은 것처럼,
지난 한 주간 동안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 것처럼.
솔직해야 하는 교회에서 오히려 속과 겉이 달라진다.
구원의 기쁨은
기쁨의 이유와 통로가 세상의 그것과는 다르다.
불편한 환경이 바뀌고
모든 문제가 속시원히 해결되어 기쁜 것이 아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내는 구원의 삶에서 온다.
성도는 인내 후에 기쁨을 누리기 전에
인내 중에 기쁨을 누린다.
가면을 쓰지 않고
그 인내와 그 기쁨을 다른 성도와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