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성령 충만’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이다.
복음서 중에는 누가복음에만 ‘성령 충만’이 나오고, 그 외에도 사도행전에 주로 나온다.
당연히 누가는 성도의 어떤 모습을 그리며 이 어휘를 사용했을 것이다.
과연 한국 교회는 그 의미로 ‘성령 충만’을 사용하고 있을까?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성령 충만’이란 단어를 사용한 예는 다음과 같다.
(1) 천사 가브리엘이 세례 요한의 잉태를 예언하며, 세례 요한이 성령 충만해서 할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 했다.(눅 1:15,16)
(2)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성령 충만해서 한 일은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된 아이를 약속된 메시야로 알아 보고 ‘내 주’라고 고백한 것이다.(눅 1:41-43)
(3) 제사장 사가랴가 성령 충만해서 한 일은 하나님의 구원하심, 말씀대로 일하심, 구원의 진리를 고백하는 일이었다.(눅 1:67-79)
(4) 예수님이 성령 충만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눅 4:1,2)
동일 저자인 사도행전에서도 ‘성령 충만’이 언급된 부분을 보면,
(1)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4)
(2) 베드로가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으나 오히려 기도하고 전도했다.(행 4:8; 31)
(3) 사도 대신 어려운 성도를 돌아보고 구제의 일을 할 사람들의 조건이었다.(행 6:3-5)
(4) ‘하나님 나라와 복음전파’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행 7장 이후)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의 대부분(물론 초자연적인 모습도 있다)은 그들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 말씀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신에게 임한 구원을 감사하고, 핍박 중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치로 묵묵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코 연속적으로 신비한 체험을 하고, 타인의 미래를 점치고, 모든 문제를 꿰뚫어 보고 해결하는 ‘마법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행 8:21)라는 말을 들었던 시몬이 멀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