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은 어떤 창조를 믿습니까?”
비신자에게서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질문이다.
나를 만나는 비기독교인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존재여부가 더 큰 문제였다.
그래서 질문은 항상 “정말 하나님이 계십니까?”였다.
대부분의 경우는 한번의 만남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몇 차례를 만나고 계절을 넘겼는데도 다시 질문은 제자리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며 그것의 핵심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더이상 설명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도하며 기다린다.
희한한 것은 내가 답을 주지도 못하는 그 질문을 가지고 1년이 넘도록 계속 나를 만나러 오신다는 것이다.
물론 2년이 지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보통은 몇 달 후, 어떤 경우엔 1년이 넘은 뒤 “하나님이 계신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는 분들이 있다.
그 앞에 오래 함께 앉아있던 나로서는 기적같이 여겨진다.
그러면 내가 묻는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생물은 진화되었을까요? 처음부터 세세하게 따로 만들어졌을까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진화로 만들었는지 세세하게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진화로 만들 수도 있고, 세세히 만들 수도 있겠지요. 그래야 진짜 하나님 아닙니까?”
너무나 경이로와 경외감밖에 들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를 놓고 제대로 경이로와하고 하나님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는 것은 막 비기독교인의 경계선을 넘은 사람들이다.
난 그들의 태도에서 오히려 배운다.
물론 신학자나 과학자들은 자신의 분야와 관련하여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분명히 그들의 수고와 성과로 많은 유익을 얻고 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 맞느냐, 유신진화론이 맞느냐를 놓고 논쟁하고, 상대방은 틀린 믿음이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 것 같다.
자녀라면 아버지의 선물을 보며 그 마음에 감탄을 하면 되지 아버지가 선물을 백화점에서 사왔는지, 마트에서 사왔는지를 놓고 자녀끼리 나름 증거를 들이대고 다투며 “너는 선물 받을 자격이 없다”든지 심지어 “너는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는 건 자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한 아버지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메카니즘에 대해 100% 선명하게 알지 못한다.
아직도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논문 쓰고 학위를 받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런 면에서 성경을 문학적으로 쓰셔서 여러 신학자와 나같은 목사를 먹여 살리시는 하나님은 참 자비로우신 분이다.
누가 내게 어떤 창조를 전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비신자를 만나면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지, 어떤 창조론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