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게 본다는 것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시력검사를 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이 시력검사표를 칠판 옆 빈 공간에 걸자 아이들이 서로 자기는 어디까지 보인다며 경쟁하듯 말했다.
곧 선생님은 보이는 걸 미리 말하면 안된다고 하셨다.
나는 왼쪽 0.4, 오른쪽 0.5로 나왔다.

나는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칠판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키가 작기도 했지만 나는 세번째 뒤로 앉은 적이 없다.
칠판 글씨를 보고 필기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멀리 있는 번호나 사람의 얼굴은 잘 알아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조금의 차이만 있을 뿐 다 그런 줄 알았는데, 나만 흐릿한 세상에 살았구나 싶은 원망과 억울함이 컸다.

선친은 안경을 쓰셨는데, 그 안경을 껴보니 앞이 보이지 않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친은 시력이 -10 정도였다.
안경은 그 정도되는 사람들이나 쓰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 때 바로 안경을 맞추지는 않았다.
더 중요한 이유는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등교해서도 매일 점심시간과 방과 후 땀과 먼지 범벅이 되도록 축구하면서 헤딩해야 하고, 야구하면서 아주 가끔이지만 야구공에 맞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니 시력이 나쁜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가니 안경 쓴 급우들이 제법 있었다.
어느 날 그 안경을 한번 써봤는데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사물의 윤곽이 선명하고 색채가 훨씬 화려하게 다가왔다.
그날의 신선함은 처음 시력검사의 충격을 넘을 정도였다.

오늘 청사포에서 미포까지 이어지는 블루라인파크를 걷는데 공기가 참 맑았다.
어제부터 바람이 거칠게 불더니 먼지를 다 쓸어가 버렸나 보다.
가까운 들꽃과 시선의 끝인 수평선까지 모두 선명하게 보이는 게 좋았다.
수평선을 자세히 보니 기대대로 대마도가 잘 보였다.
가까이 있는 오륙도는 더욱 가까이 보였다.

선명하게 보이는 들꽃과 수평선 [사진 강신욱]
수평선에 접하여 보이는 대마도
오륙도와 이기대

처음 이 산책로를 걸을 때 아내에게 “왜 이 길을 ‘블루라인’이라고 했을까? 주변의 해송이 늘 초록이니 오히려 ‘그린라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라고 했었다.
오늘 문득 이 길이 왜 블루라인인지 알 것 같다.

그림같은 파란 하늘과 흰 구름

파란 하늘과 선명한 수평선을 보며 문득 옛날 첫 시력검사의 추억이 떠올랐다.
맑고 상쾌한 공기 속에서 선명하게 본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안심시키는 것인가, 감사한 것인가, 큰 행복인가 다시 새긴다.
가슴이 시원해진다.
원래 이런 색깔이었구나, 이렇게 선명한 것이었구나,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원래 이런 느낌을 받았어야 했구나.
지금 보이는 것이 다시 흐려질까 눈에 꼭 담고 싶다.

비단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뿐일까?
우리의 마음의 눈은 얼마나 흐릿한가 말이다.
어려서 잘 모르던 부모님의 사랑, 미숙해서 잘 몰랐던 친구의 배려, 어색해서 잘 받지 못했던 이웃의 친절까지.
나중에 돌아보면 깨닫게 될 때가 있다.
마음의 눈을 가리던 것이 벗겨지고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이렇게 고마운 것이었구나,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힘들었을 텐데도 그렇게 했었구나, 내가 정말 잘 받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했구나.

성경에도 최고의 가치인 사랑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성경이 기록된 고대 사회에선 현재 같은 맑고 선명하게 보이는 유리거울을 쓰지 못하고 흐릿하게 보이는 청동거울을 사용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잘 알기도 쉽지 않은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안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성도는 이 세상 사는 동안 그 답답함을 안고 산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 앞에선 안타깝게도 할 말이 없다.
막연히 이몽룡을 기다리는 춘향이처럼 내세울 증거도 없이 약속만 붙잡고 그날을 기다린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 야속하게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나 자연만물을 통해 비춰보던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가 올 것이다.
흐릿하게 알던 하나님을 온전히 알 때가 올 것이다.
그 선명함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울까 생각하면 벌써부터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