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안정적인 교회를 떠나는 게 나도 두렵다.
가장으로서 가정의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매달 계좌로 들어오던 사례금을 포기하자니 막막했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지?’
이런 걱정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네 아이들이 즐겁게 모여 놀고 있다.
처음엔 흐뭇하게 보다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쟤네들은 걱정도 되지 않나?’

“얘들아, 세상 표현으로 하면 아빠는 실직한거야.
앞으로 우리집이 뭘 먹고 살지 걱정되지 않니?”
아이들은 전혀 미안하다는 기색없이 쉽게 대답했다. “예”

“왜? 어떻게?”
“그건 아빠가 알아서 하실 일이잖아요.”
그 대답은 내 머리를 망치로 치는 것과 같았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염려해서 내가 먹고 사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먹여 살린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목사같으니라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1-33)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아비가 되니
자식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미리 챙기게 된다.
하물며 아버지 하나님이시랴.

아이들이 먹고 입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아비된 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요,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일이다.
이 말씀이 이렇게 든든한 말씀이었다니.

목사 20년차가 되어서야 이제 이 말씀이 와닿는다.
이제 이 말씀의 의미와 크기가 와닿는다.
먹고 사는 것은 처음부터 내가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고
내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먹이고 잘 입히실까 염려하시면 된다.
이제 먹고 사는 것이 안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