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25분.
약속 장소에 5분 먼저 도착해서 따뜻한 청귤차와 간식용 빵을 사고 있는데, 같이 공부하는 분들이 띄엄띄엄 도착했다.
각자 자신의 음료를 사서 늘 앉던 테이블에 앉았다.
첫 이야기는 아이들의 개학이었고, 백신 접종이었다.
다들 1차 접종을 했는데 한 사람은 조금 겁나서 미루고 있다고 했다.
오늘 남편이 맞는데 그걸 보고 따라 맞을 생각이란다.
미리 비타민을 먹어둬야 한다는 둥, 접종 후 타이레놀을 먹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가 오갔다.
“지난 번 모임 때 하나님의 질서에서 떠난 것이 죄이고 타락이라고 했던 것 기억나시죠?”
“예”
“이것처럼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단어와 성경에서 말하는 단어가 생긴 것은 같아도 그 의미는 조금 다를 때가 있습니다. 보통 ‘사랑’하면 연인들과 사람들 사이의 애틋한 감정을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사랑’은 마치 부모가 어린 자식을 사랑할 때 앞뒤좌우를 생각하며 어떤 때는 거절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리 뭔가를 준비하기도 하는 것과 같은 성격입니다. 성경적 의미로 ‘타락’을 말하는데 일반적 의미로 들으면 불쾌할 수 있지요”
“맞아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외면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내쫓기는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첫 희생입니다. 좋은 환경이 아닌 에덴동산 바깥으로 나가는 그들을 위해 짐승이 죽은 것이죠. 인간이 처음으로 ‘죽음’이란 실체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죽음의 성격이 뭐냐면 ‘희생’입니다. 사람을 위한”
“아…”
“그후 타락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제도가 제사입니다. 혹시 성경에 ‘레위기’란 책 들어보셨어요?”
“아니요”
“그런 책이 있는데 제사법과 율법을 기록한 책이거든요. 거기에 보면 죄 지은 사람이 자기 죄를 없애기 위해 짐승을 제물로 잡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냥 짐승이 아니라 1년 된 양입니다. 옛날에는 자기가 집에서 어미 양으로부터 새끼를 받았습니다. 너무 어린 새끼는 마치 요즘 애완견처럼 집에서 키웁니다. 얼마나 귀엽고 정을 줄까요? 그런데 어느 날 자기의 죄 때문에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양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 죄가 양에게 옮겨지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양을 죽입니다. 네 다리를 자르고…”
여기서 한 분이 입을 가리고 “아…”하며 낮은 비명을 질렀다.
“너무 끔찍하네요”
나는 계속 설명했다.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배를 가르고 창자를 빼내고 그걸 제단 위에 벌여 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양에게 미안했을 것 같아요”
“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겠지요.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아니요”
“그럼 또 다른 양을 잡아야 하는 겁니다”
“점점 만성이 되어 나중에는 괜찮아졌을까요?”
“그 일이 만성이 될까요? 또 다른 양이 자기가 직접 받아내고 또 다른 생김새와 다른 느낌으로 다른 이름을 부르며 길렀을 텐데요”
“그러네요. 만성이 될 수 없겠네요”
“여기에 있는 개념이 ‘대속(代贖)’입니다. 혹시 ‘대속’이란 말 들어보셨어요?”
“아니요”
내가 준비한 메모지에 볼펜으로 代贖을 썼다.
“대신할 대 자에 값을 치른다는 속 자입니다. 옛날에는 조개를 화폐로 쓰기도 했지요?”
“예, 그건 알고 있지요”
“대신 대가를 지불한다는 의미가 바로 ‘대속’입니다. 제물이 된 양의 입장에서 보면 대속이지만, 양 대신 목숨을 건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구속(救贖)’입니다”
代贖 아래에 救贖을 썼다.
“구원할 구 자를 써서, 값을 치르고 구원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대속과 구속의 정점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마치 양에게 죄가 전가되듯이. 성경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했습니다. 마치 사람이 양을 제물로 잡아 죽이듯이”
이 때 세 명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중 중요한 것이 ‘다 이루었다’인데, 이것은 다른 말로 ‘대가를 다 지불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치 양에게 내 죄가 다 전가되어 양이 되신 죽으면 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양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세 명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복음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세 명이 의아해했다.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는다고 했는데 복음이 다가 아니고 또 뭐가 있다는 것인가라는 표정으로.
“십자가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는 것이고 이렇게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교회는 다분히 이 부분만 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전하면 ‘나중에 천국 갈 사람들만 모여서 우리끼리 잘해보자’하는 것이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만 알면 반쪽 복음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성찬의 복음입니다. ‘성찬’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아니요”
“교회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님의 살이다’, ‘예수님의 피다’ 하는 이야기 못들어보셨어요?”
“그 이야기는 들어 봤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도가 사라졌는데 예수님이 만드신 제도가 바로 ‘성찬’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성도가 같이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당시로는 엄청난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신분사회여서 자유인과 노예간의 겸상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교회에선 신분에 의한 차별없이 겸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에 유일하게 ‘노예도 위한 밥상’이 교회에 차려진 거죠. 이것은 예수님이 만드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나타냅니다. 신분이나 빈부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모든 짐승이 획일적으로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자가 힘으로 위협하지 않고 양이 사자 앞에 주눅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중에 죽어서 천국간다는 것만 있지 않고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 것인가까지 있는데, 그것을 드러낸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대속의 십자가와 차별없는 성찬이 같이 가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한국 교회는 다분히 십자가만 강조했습니다. 이 땅에서 교회와 성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선 무지했습니다. 내세의 천국을 강조하고 이 땅에선 각 교회가 커지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도 40대 초반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아닌 겁니다. 다시 성경을 보고 공부하는데 아닌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실은 성찬식 때 차별없는 하나님 나라도 함께 강조되어야 하는데, 그런 말은 전혀 없이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 먹고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돈 있는 사람들끼리 거한 식사하고, 돈 없는 사람들끼리 약소한 식사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런 일이 교회에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노동운동을 하거나 좌파로 오해 받습니다. 실은 로마시대 때에도 평등을 강조한 성찬 때문에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야기해야 진정한 복음입니다”
“목사님, 십자가 이야기도 이렇게 자세하고 쉬운 설명 처음 듣고요, 성찬 이야기는 완전 처음 듣습니다”
“이런 삶을 살고 싶으세요?”
다들 내 눈을 쳐다 보긴 하는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당장 결단한다는 대답을 하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떠세요?”
그들이 경험한 교회와 교인들 이야기를 했다.
왜 그들이 교회와 교인들에 대해 등을 돌리게 되었는지 알게 됐다.
이런 배경이 있음에도 목사인 나를 만나주고 있었구나 싶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복음이 좋은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첫번째는 옛날 사람이 양에게 자기 죄를 의탁하듯 우리 죄를 예수님께 의탁하는 겁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각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정말 여러분의 죄를 예수님이 맡으셨다고 믿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갑자기 성자가 된다거나 외부적으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여러분 마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겁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거창하게 사회를 개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파트에서 만나는 경비 아저씨,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만 잘해도 그분들을 도와드리는 겁니다. 분리수거일에 보면 큰 박스에 이것저것 다 담아서 그냥 내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경비아저씨가 그걸 다 분리하시더라구요. 페트병에서 라벨을 잘 뜯어내고, 페트병과 일반 플라스틱을 따로 모으고, 내부도 세척하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이웃을 위해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만 나가면 다 까먹는데요”
“맞아요”
“그래도 단톡방 목사님 프사 보면 공부했던 게 기억나요”
“이젠 프사를 보지 않고 플라스틱 쓰레기만 봐도 제가 생각날 겁니다 ㅎㅎ”
“그럴 것 같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8시 경 아침의 대화가 생각나서 단톡방에 남편이 백신 접종한 경과가 어떠냐고 물었다.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답글이 왔다.
이어 다른 글이 달렸다.
“목사님 프사를 보며 오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오늘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오늘 하루종일 목사님 말씀이 생각나는 하루였습니다”
이들의 글에 대한 나의 답글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가슴 뿌듯하게 잘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