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가인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축을 하는 자의 조상이 된 사람도 있고,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자의 조상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에 구리와 쇠로 기구를 만드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두발가인입니다. 혹시 영화 ‘노아’를 보셨습니까?”
“아뇨”
“저는 봤는데요”
“거기에 보면 방주를 만드는 노아와 대립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 사람 이름이 ‘두발가인’입니다”
“기억이 나질 않네요.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봤네요”
“구리와 쇠로 뭘 만드는 사람이란 건 단순하지 않습니다. 옛날 석기 시대에 갑자기 청동으로 뭘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사람이 청동으로 뭘 만들었을까요?”
“무기요?”
“그렇죠. 고대 유물로 청동검 나오잖아요. 석기와는 다른 고급 무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권력이 되고 압제가 일어나고 폭력을 행사하고 약탈이 일어나고 계급이 만들어지는거죠”
“그런 거군요”
“한 예가 23절과 24절에 나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어떤 소년이 라멕이란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고대 탈리오의 법칙 아세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예,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고 하죠. 성경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왜 이런 법이 필요했는지 아시겠어요? 만약 다른 사람이 내 눈을 상하게 해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면 어떻게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똑같이 갚아줘야죠”
“마음이 착하십니다. 보통 사람은 그러지 않죠. ‘내 눈을 상하게 했어? 저놈을 죽여버려야지’가 됩니다. 더 끔찍하고 과한 보복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법이 동해보복법입니다. 그런데 라멕은 어떻게 했는가? 그 소년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럼 소년의 가족이 ‘우리 아들을 죽여? 너도 죽어라. 아니 너의 가족도 죽어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라멕은 그 시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조금 다친 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그 일에 대해서 숨기거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내가 죽였다. 왜? 나를 건드리는 놈은 다 이렇게 된다’라고 오히려 드러내고 위협할 수 있는 계급인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라멕이 끔찍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이 너무 두려워하니까 하나님이 너를 해하면 7배나 벌을 줄테니 안심하라고 해주셨는데, 라멕은 자기를 건드리면 77배나 되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말이 되지 않죠. 그런 폭력과 횡포를 저지르는 사람이 벌써 그 시대에 나타났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힘과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그렇게 다른 사람을 향한 압제와 폭력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재벌처럼 엄청 돈이 많고 권력을 가졌다면 어떨까요?”
“글쎄요, 상상만 해도 일단 좋네요”
“ㅎㅎ 좋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힘과 권력이 없어서 이렇게 착한 얼굴로 앉아있지 만약 가졌다면 어떻게 변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하나님이 우리가 나쁜 짓 하지 말라고 돈과 권력을 주지 않으셨는지도 몰라요”
“그런가요? 저는 나쁜 짓 안할건데…”
“라멕은 자기가 해를 당하면 77배나 보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타인이 잘못하면 7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삼세 번이란 말이 있듯이 3번 참고 용서하는 것도 대단한 거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70번씩 7번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70 곱하기 7, 490번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이번까지 470번 용서했다. 20번만 더 참으면 복수한다’ 이렇게 하라는 것일까요?”
“아니요”
“누가 그걸 400번 넘게 세고 있겠습니까? 이건 그냥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이죠. 타락한 인간은 권력을 잡고선 자신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77배 보복법을 만드는데, 예수님은 490번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77배 보복하는 것도, 490번 용서하는 것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음의 자세가 사회에 유익이 될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문득 기도로 마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가 기도하고 마쳐도 될까요?”
“예”
“그럼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다들 다른 인생을 살고 바쁜데 우리가 함께 모여 성경을 공부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계속 나빠지는지 성경을 통해 봤습니다. 우리의 본성도 그런 줄 압니다. 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과 용서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다음에 만날 때까지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이 모임에서 처음으로 기도했다.
기도한 것도 감사하고 다들 아멘이라고 해준 것이 감사했다.
감격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두고, 얼른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다.
“아멘이라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은 ‘진실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종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그 때 ‘아멘, 아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걸 기도가 끝난 후나 다른 사람들의 말이 끝난 다음에 하면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아,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멘’을 자주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