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이후 한 사건이 있는데요,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하체를 드러낸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들 중 한 명인 함이 그 사실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다고 했습니다. 뉘앙스가 단순히 정보제공이 아닌 비난의 느낌입니다. 그랬더니 다른 형제 둘이 옷을 들고 뒷걸음을 쳐 아비 노아의 하체를 가립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가 아들들을 저주하기도 하고 축복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이 9장 25절부터 27절까지 나옵니다”
창세기 9:25-27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퍼지게 된 건데, 쉽게 함은 아프리카계, 셈은 아시아계, 야벳은 유럽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너무 도식적인 구별은 옳지 않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을 소개하면서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가나안은 지금 이스라엘이 있는 지역입니다. 어느 조상의 후손이 대륙을 정해 놓고 그 대륙 안에서만 살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오래 전 옛날에는 현재의 대륙 모양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요. 대륙이동설 아시죠?”
“예”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지역에 살던 가나안 민족들을 쫓아내거나 노예로 삼습니다. 이 예언이 이루어진 거죠. 주의할 것은 이 구절을 가지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짐승처럼 잡아 노예로 삼은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한 민족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 역할을 한 것이 이스라엘 뿐만 아닙니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같은 제국은 여러 민족을 복속시킬 수밖에 없는데요, 바벨론을 망하게 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는 페르시아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첫 왕 고레스는 그 민족들이 자기의 옛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덕분에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11장 뒤편에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요, 잘 보시면 사람들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 보입니다. 노아 이전 시대에 사람들이 몇 살까지 살았는지 기억하세요?”
“9백 살요”
“네, 9백 살 넘게 산 사람들이 수두룩했지요. 그런데 노아가 9백 살 넘게 산 이후로 5백 살, 4백 살, 2백 살, 1백 살대로 팍팍 떨어집니다. 아마 홍수 이후 자연과 기후의 변화가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자세한 이유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걸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다를 겁니다. 만약 팍팍 수명이 떨어지는 일을 겪는다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방법을 찾겠지요”
“요즘 같으면 의료체계를 만들어 수명을 연장한다고 할텐데, 아주 오랜 옛날이니 일단 뭉치고 시스템을 만들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게 바벨탑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멈춘 곳이 어디라고 했는지 기억하세요?”
“아…라…”
“터키 서부에 있는 아라랏산입니다”
나는 패드에 수학의 집합기호같이 터키를 그렸다.
흑해를 표시하고 요즘 분쟁지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병팝된 크림반도를 대충 표시했다.
약간 오른쪽 아래로 아라비아 반도를 그리고, 그 위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그렸다.
“아라랏산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건축의 혁명을 일으킵니다”
“예? 건축요?”
“아주 옛날에는 건축할 때 돌을 그대로 쓰거나 돌을 필요한 크기로 깎아서 사용했습니다. 나중에는 진흙과 짚으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그건 그냥 말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돌을 불로 구우면 돌처럼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주 멋있고 견고한 고대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말을 보세요. 11장 4절에 보면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 그럽니다. 성읍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입니다. 이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뭐라고 하셨냐면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은 다시 ‘땅에 가득하라’ 하셨습니다. 골고루 퍼져 살라고 하신거죠. 자연을 잘 관리하는 것은 아담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런데 4절 마지막에 보세요.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흩어져서 살기 싫다는 겁니다. 불편하고 힘이 없으니까. 하나님 말씀 어기고 뭉쳐서 편하고 힘있게 살겠다는 겁니다. 지금 세상에는 그냥 도시가 아니라 ‘메트로’라고 불리는 큰 도시집단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수도권에 20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메트로마닐라, 동경, 뉴욕, LA 등이 그런 곳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살면 엄청나게 자연이 파괴됩니다. 자연의 자정이나 회복 작용이 일어나기 힘들고, 사람들은 에너지나 물자를 과잉 소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은 더 파괴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거죠”
“사람들은 성읍과 함께 탑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인간이 높은 건물을 쌓는다는 건 하나님이 계신 하늘같이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처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포기되지 않은거죠. 에덴동산에서는 그냥 선과 악을 아는 것에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했지만 이제 사람들이 모여 벽돌로 뭔가를 만들 수 있으니 물리적으로도 하나님처럼 높이 오르고 싶은 겁니다. 고대의 오벨리스크 아시죠? 삐죽하게 솟은 것?”
“예”
“그렇게 높은 탑을 쌓아 놓고 자기의 업적을 새겨 넣습니다. 4절 중간에 있는 것처럼 ‘이름을 내자’는 것이죠. 한 마디로 인간의 허영과 교만을 가림없이 드러낸 것이 바로 탑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마천루가 되겠지요. 높은 빌딩에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자원이 낭비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서울의 수십 층 고층 빌딩에서 사용하는 물의 양이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사용하는 물의 양과 비슷하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도시와 탑은 태생의 본질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