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한 분이 내게 질문했다.
“목사님, 일요일에 예배를 시작하면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 하나요?”
나는 그분이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고민해야 했다.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되나요?”
“그래서 낮은울타리예요. 들락날락하기 편하라고요”
“ㅎㅎ 그런 뜻이었어요?”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왔고, 가족들과도 시간을 보내셔야 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가족들이 다 집에 있는 일요일 오후마다 시간을 빼기가 쉽겠어요? 어쩌다 가족 여행도 하실테고”
“그러니까요”
“다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너무 부담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더운 여름엔 다같이 쉬자고 할거예요”
“그래도 되나요? 낮은울타리라서 좋네요”
“신앙생활을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해야지 매이듯 하면 서로가 힘들죠”
“부담을 덜어 주셔서 감사해요”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한 것 같은 답을 한 것 같아 안도했다.
이제 겨우 마음 문을 열고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사람에게 직분자의 수준을 요구하면 안될 것 같았다.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기독교를 처음 믿는 분들은 예배 때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신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원하는 일을 해주시고, 어떤 결정을 할지 답도 주시는 걸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믿겠다고 달려들 걸요. 교회에 입장하려면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ㅋㅋ”
“예배는 피조물로서 구원받은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 앞에 당연히 해야 하는 반응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제사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꾸준히 하나님 앞에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도 아무런 말씀없이 아브라함을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사실 인간으로서는 조금 답답한 시간이지요. 아브라함도 정말 오랜만에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낮은울타리 예배도 아마 그럴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전능한’의 의미는 우리가 느끼기엔 슈퍼파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출산한 산모의 젖이 불어 아기에게 얼마든지 먹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엄마의 품은 아기에게 전부이고 모든 것이 완벽한 곳이죠. 하나님은 지금 ‘나는 힘이 세다. 그러니 내 앞에 꿇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그런 관계를 맺고, 그런 공급을 하는 존재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닌데 실은 다정한 표현인 거네요”
“예,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표현인 거죠”
“그렇다면 이 말 다음에 나오는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는 표현도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단어 의미 그대로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일까요?”
“아니요”
“우리가 앞에서 봤듯이 아브라함도 인간적으로 보기에도 부족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갑자기 엄격한 점검 분위기를 만드시는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하나님의 ‘전능함’이 엄마 품같은 느낌이라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완전함’은 인간적인 완벽함을 의미하는 ‘완전함’이 아니라 아기가 엄마 품에 제대로 잘 안겨있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기대하는 건 엄마 젖 잘 먹고, 엄마 품을 떠나지 않고 꼭 안겨있는 거죠”
“완전 다른 느낌인데요. 뭔가 친근한…”
“맞아요.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을 선하게 인도해 주셨잖아요. 갑자기 ‘너 똑바로 살아라’ 이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지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사건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앞뒤의 사건이나 문맥을 잘 봐야 합니다. 이 ‘완전함’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의로움’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은 사전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태도인 것 기억하시죠?”
“예”
“기독교에서 완전함이나 의로움은 아기가 엄마를 전적으로 의지하듯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걸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