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서야 아브라함의 눈에 한 숫양이 수풀에 있는 걸 봤습니다. 하갈이 사막에서 샘을 발견한 것과 비슷하죠. 직전까지는 보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선 발견한 겁니다”
“그러네요”
“그 양을 잡아서 준비된 제단 위에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사막에 샘이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고, 숫양이 그 때 갑자기 수풀에 걸린 것도 아닐텐데요. 그전까지는 그들의 눈에 샘이든 양이든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고선 그게 맞다고 우기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고, 사람은 사건을 겪고 나서야 그 준비하신 것을 깨닫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는 뜻입니다”
“22장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대속(代贖)’입니다. 대신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예전에 설명드린 일이 있는데 기억 나시죠?”
“예”
어림짐작으로 내가 10개월 동안 이 단어를 수십 번은 쓴 것 같다.
성경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냐는 것이니까
“예수님이 해 주신 게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해서 하나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는 죽음을 맛보았고, 결국 육신도 죽고, 영혼이 지옥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되는 죽음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그 대가를 치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속’하셨고, 사람은 ‘구속(救贖)’ 또는 ‘구원(救援)’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 ‘네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를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하셨어요. 그런데 여기서 ‘네 씨’는 단순히 외아들 이삭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신약 로마서에 보면 여기서의 ‘씨’는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나와요. 예수님은 성읍을 빼앗고 성문을 차지한 적이 없거든요. 그러면 여기 나오는 ‘대적’은 누구일까요?”
“사탄요”
“맞습니다. 사탄의 성문은 사탄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가는 문이겠지요. 그 문을 예수님이 빼앗는다는 것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지나간 다음 아브라함과 이삭이 종 둘과 나귀를 남겨 뒀던 곳으로 돌아와서 같이 사라가 기다리고 있는 브엘세바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여기에서 끝나는데요. 이삭은 죽지 않았으니 해피엔딩인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까가 참 궁금합니다”
“목사님인데 뭐가 궁금하세요?”
“두 가지인데요, 첫째는 ‘이삭이 집에 돌아와서 엄마인 사라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이야기했을까?’이고, 둘째는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칼로 죽이려는 걸 당한 사람인데 트라우마가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을까?’라는 겁니다”
다른 교회를 다니시는 비신자 분들을 소개하신 분이 말했다.
“저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런데 목사님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내가 이 사건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게 ‘하나님이 양을 준비해 주셨다’는 은혜로운 간증으로 그냥 끝날 사건인가 말입니다. 그냥 기독교를 옹호하는 마음으로 성경의 내용이면 뭐든 좋게 생각하려는 입장이 아니라 나와 이 성경을 같이 읽어나가는 비신자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면 단순한 해피엔딩은 아니란 겁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겪는 일에는 모두 명암이 있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무조건 해피엔딩으로만 보지 말고 밝은 쪽만 보지 말고, 그들이 실제로 겪어야 했을 어두운 부분도 보자는 거죠. 왜냐면 우리는 명암을 겪으며 살고 있으니까요. 밝은 부분만 이야기 들었는데 어두운 부분도 접하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거지?’라며 계속 찝찝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해피엔딩을 부러워하지만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보면 그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좋은 해피엔딩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늘 본향인 천국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삶이 해피엔딩이면 굳이 천국까지 갈 필요가 없겠지요. 믿음으로 행보를 하면서도 모든 것이 시원하지는 않아 여전히 천국을 사모하는 이것이 기독교인의 리얼라이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