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 10분 지나 두 분이 낮은울타리로 들어오셨다.
“목사님, 저희 한 달만에 모인 것 아세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한 달이나 된 줄은 몰랐네요”
“가족 여행도 있었고, 다른 일도 너무 많았어요”
“5월이 가정의 달이라 모임이 어려울 줄 알았습니다”
“가정의 달보다 제가 카페를 열게 되었어요”
“와, 축하드립니다. 그럼 사장님이 되시는 거예요?”
“예, 지금은 사장이 아니라 다른 카페에 가서 일 배우고 있어요. 너무 힘들어요”
“얼마전 바리스타 자격증 따시더니…”
“이걸 하려고 딴 건 아니었는데 남편이 하면 좋겠다고 일을 진행시키더라고요. 그런데 너무 빨리 진행되는 거예요. 정말 한 달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창세기 23장을 할 건데, 사라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사라’가 누군지 기억하시죠?”
“그럼요”
“아브라함의 아내요,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가 127세로 헤브론에서 죽습니다. 헤브론이 어딘지 지도에서 찾아 보시겠어요? 먼저 아브라함이 어느 노선으로 주로 다녔다고 했지요?”
“이 빨간 선 위로요”
“그럼 그 위에서 찾아 보세요”
“여기요”
“제가 가르치는 자로서 이렇게 척척 찾으시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사라가 127세이면 아들 이삭은 몇 살일까요? 사라가 이삭을 몇 살에 낳았는지 기억하세요?”
“…”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는데 사라가 10살 어리니까 90세입니다. 그러면…”
“37세네요”
“예, 산수가 빠르십니다. 이삭이 37세에 자기에게 큰 의지가 되었던 어머니 사라가 사망한 것입니다. 이삭은 큰 슬픔에 빠졌을 겁니다”
“문제는 사라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거죠. 우리나라는 주로 땅에 묻지만 아주 오래 전에는 고인돌도 있었잖아요. 이 지방은 동굴 같은 곳에 시신을 두고 큰 돌로 입구를 막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유목민으로서 브엘세바와 헤브론 중심으로 왔다갔다했는데, 이젠 매장지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 지역의 원주민으로 살고 있는 헷 족속을 찾아가 매장지를 요청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소유의 땅이 한 평도 없었으니까요. 예의를 갖춰 헷 족속에게 자기를 소개하고 매장지가 필요한 상황을 갖고 설득하는 거죠”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그네’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때 가나안에 들어와 몇 년이나 살았는지 계산해 볼까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게 몇 살 때인지 기억나세요?”
“75세요”
“그 때 사라의 나이는요?”
“10살 어리니까 65세요”
“사라가 몇 살에 죽었다고 했죠?”
“127세요”
“그럼 가나안에 몇 년 산 거죠?”
“62년요. 엄청 오래 살았네요”
“예, 사라는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 인생만큼 가나안에서 살았습니다. 가나안에 오기 전에도 이동을 했으니까 사실 가나안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62년이나 그 지역에서 살았는데도 아브라함은 아직 나그네요, 아직 땅 한 평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부동산 좋아하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는 참 이해하지 못할 삶의 방식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성경이 보는 인생에 대한 시각입니다. 천상병 시인이 인생을 ‘소풍’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성경은 인생을 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라고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감되는 부분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