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자 여성들과 성경공부 – 이삭의 결혼(1)

함께 창세기를 공부하는 여성분들은 성경을 갖고 오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린이 그림성경을 사줬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성경은 없다.
성경을 선물할까 생각도 했지만 아직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공부할 때 같이 모니터를 보면 시선도 모으고 쓰면서 설명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큰 모니터에 창세기 24장을 띄웠다.

“사라가 127세에 사망했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의 나이는 몇 살일까요?”
“137세요”
“나이가 엄청 많죠. 자신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할 나이입니다. 그렇다면 뭘 생각하게 될까요?”
“아들 장가 보내야죠”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혼시킬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60년 넘는 세월을 보내며 그 땅 사람들을 보고 그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니 그 땅 여인을 며느리로 맞고 싶지 않은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일도 봤고, 롯의 가정이 어떻게 어떻게 되는지도 봤으니까요. 그래서 자기 친척 중에서 며느리를 삼기로 작정합니다. 아브라함의 친척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고향에 있겠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집안의 모든 살림을 맡아하는 고참 종을 고향 땅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종을 고향으로 보내기 전에 묘한 걸 시킵니다. 자기 허벅지 밑에 손을 넣으라고 한 겁니다. 예전 성경에는 ‘환도뼈 밑에 손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환도뼈가 어딘가요?”
나는 일어나서 청바지 앞주머니에 박힌 리벳과 뒷주머니 사이를 가리켰다.
“이 부분인데요. 고관절 약간 뒷부분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족장이 앉아 있으니까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는 모양새가 되는 거죠. 당시 주인이 종에게 중요한 일을 시킬 때 요구하는 자세였는데, 이건 목숨을 걸라는 의미입니다. 분위기는 엄청 진지하지만 이 장면을 한번 머리 속에 그려 보세요.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데 다른 할아버지가 엉덩이 밑쪽으로 손을 넣은 모습이예요.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네요”

“종이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사항을 물었습니다. ‘신부감은 고향땅 친지 중에서 고르는데 만약 신부감이 가나안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이삭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까요?’라고 물은 거죠. 주인의 진심을 헤아리려는 정말 똑똑한 종입니다. 아브라함이 집안 살림을 믿고 맡길 만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건 안되고 반드시 신부감이 이곳으로 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밝히는데 아브라함의 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 땅으로 와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자기 땅이 있나요?”
“아니요”
“자기 땅이라곤 아내 무덤밖에 없으면서도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확실히 믿는 거죠. 이런 부분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실수도 많이 하고, 감정이 흔들리기도 하는 사람인 걸 이제까지 여러 사건을 통해 봤잖아요. 그런데 가끔씩 이런 멘트를 하는 걸 보면 신기한 거죠. 바로 이 부분에서 신앙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구원받았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라고 하면 공로주의로 가는 겁니다. 구원의 근거가 아브라함에게, 사람에게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에게 있었다는 거죠. 이건 아닙니다. 그럼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다가가 주셨길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그렇게 철썩같이 믿었을까?’로 가야 합니다. ‘나하고 똑같은 아브라함을 기다리시면서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참 인내심도 많고 대단하시다’가 되면 ‘아브라함을 그렇게 만든 하나님은 나도 그렇게 만드실 거야’라는 소망이 생기고, 성경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옛날 이스라엘 신화일 뿐이예요”
“성경을 그렇게 봐야 되는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