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가 사망했을 때 아브라함은 몇 세일까요?”
“사라가 127세니까 137세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재혼을 했어요”
“예? 재혼을요?”
“이삭이 결혼을 하기 전인지 하고 난 다음인지 정확하진 않습니다. 이삭이 결혼을 한 다음이면 140세가 넘어서겠지요”
“140세가 넘었는데 재혼을 한다고요? 남자들은 정말… 아브라함도 그냥 남자네요”
“재혼만 한 게 아니라 아들도 줄줄이 낳았어요. 그것도 여섯 명이나”
“그 나이에 하나를 낳아도 기적인데 여섯 명이나요?”
“예”
“여러 명과 재혼을 한 건가요?”
“아니요. ‘그두라’라는 한 명입니다”
“그렇다면 매년 낳았어도 최소 7년 이상이 걸렸을텐데. 그럼 150세까지 아들을 낳은 거네요”
“계산 상으로는 그렇네요”
“어후…그러고 싶을까?”
이 모임을 주선하신 기존 신자분께 물었다.
“혹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중에 하나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아요. 오른손 올려요. 믿음의 조상~’ 이렇게 반복하는 노래인데”
“알지요. 그 다음엔 ‘왼손 올려요’ 하잖아요”
“예, 오른손, 왼손, 오른발, 왼발 차례로 하며 얄궂은 춤을 추지요”
“저도 알 것 같은데요”
불교집안이라고 한 분이 안다고 해서 놀라웠다.
“어떻게 아세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여름성경학교에서 배웠나?”
“여름성경학교는 많은 아이들을 초대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거기에 아브라함의 아들이 몇 명으로 나오나요?”
“일곱 명요”
“저는 노래를 같이 불러야 하니까 따라 하면서도 그게 너무 이상했어요.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 한 명 뿐인데 왜 일곱이라고 하지?’라고 생각했죠. 어린이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재혼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니까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성경을 읽으면서 그제야 알게 되었어요. 아브라함이 재혼을 했고, 다른 아들들도 낳았다는 걸요. 그 아들이 여섯 명이니까 이삭까지 일곱 명인 거죠”
“이스마엘은요?”
“서자라서 뺀 것 같아요”
“서자는 이래저래 서럽네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생전에 그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고 모두 가나안을 떠나 동쪽으로 이주하게 했어요. 하나님의 약속에 이삭과 그 후손이 그 땅에 있어야 하니까요. 140세 가까이에 재혼을 하고 150이 되도록 자식을 낳은 건 좀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건 참 귀한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175세가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75세에 들어왔으니 거기서 100년을 산 거죠. 그러나 소유한 땅이라고는 바가지 쓰고 산 돌무덤이 있는 밭 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안고 살다가 떠난 겁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진 현실은 보지 못했지만 신약성경에선 아브라함이 그걸 믿음으로 바라봤다고 합니다. 정말 믿음 하나만 붙잡고 산 거예요.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례는 이삭과 이스마엘이 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정말 동쪽 멀리 떠났나 봅니다. 이스마엘은 남쪽 광야지역에 살고 있었으니 소식을 듣게 되었나 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헤아려 첫사랑을 주었던 아들이니 불렀을 수도 있고요. 아브라함이 샀고 아내 사라가 이미 묻힌 헤브론 땅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또 헤브론을 떠나 멀리 남쪽 브엘세바 아래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살았다고 합니다”
“브엘라해로이 기억하세요? 하갈이 광야로 도망갔을 때 만난 샘이잖아요?”
“예”
“그러니까 브엘라해로이는 가나안 최남단 브엘세바에서도 더 광야로 들어간 곳인 겁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으로부터 확보한 브엘세바에서 제대로 거주하지 못한 거죠. 뭔가 어려운 사정이 있었던 것 아닌가 싶은데요. 그런데 창세기 25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그런 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신 복은 앞으로 이삭의 일생을 보면 알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