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성경공부(16) – 전 5:1-7

“성경 중에서 잠언과 전도서를 ‘지혜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서’의 상위 개념으로 분류하는 방법이 있는데 뭔지 기억하세요?”
“시가서요”
“맞습니다. 이게 잠언과 전도서를 보는 시각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잠언과 전도서는 시편처럼 시입니다. 전도서가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산문처럼 편집이 되어 산문처럼 읽기 쉽지만 가끔씩 전도서가 시가서란 걸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축약된 시는 아니지만 시적 요소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전도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네요, 전도서를 읽으면서 한 번도 시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시라고 생각하며 읽으면 조금 느낌이 다를 것 같기도 하네요”

“오늘은 5장을 할텐데요, 5장 1절부터 7절까지에서 반복되는 표현을 찾아 보시겠어요?”
“‘우매한 자’인가요?”
“7절까지 ‘우매한 자’가 3번 나옵니다. 그런데 더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원’도 많이 나오는데요”
“서원도 5번이나 나오니까 많이 반복된 거죠. 그보다 더 많이 반복한 단어가 있습니다. 너무 쉬워서 못찾으시는 것일 수도 있어요”
“아,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시겠어요?”
“7번요”
“맞습니다. 일곱 절에 7번 나오니까 매절 나오는 셈이지요. 그런데 6절에 나오는 천사도 ‘하나님의 사자’로서 결국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8번 나오는 셈입니다. 4장까지 오면서 솔로몬이 이렇게 ‘하나님’을 자주 반복한 적이 없습니다. 시는 산문보다 단어 자체로 표현하는 무게가 더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이 단락에서 하나님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1장부터 5장까지 이런 걸 염두에 두고 읽었다면 분위기가 확 바뀐 걸 감지할 수 있을 겁니다”

“1절부터 7절까지 ‘우매한 자’가 하는 짓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1절에 나오는데요, 그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제물을 드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는 않으면서 제물로 하나님을 달래서 자기의 소원을 이루려는 시도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겁니다. 우리말로는 ‘듣다’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히브리어 ‘솨마’라는 단어는 ‘듣다’라는 의미와 ‘순종하다’라는 의미가 같이 있습니다. ‘듣고 행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떨까요?”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제대로 전하지도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듣고 행하는 모습은 없으면서 제물을 바친다는 건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자기 의(義)’이기도 합니다. 이건 아무리 예배당에서 예배행위를 하더라도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매한 자의 둘째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3절 앞부분에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꿈’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 ‘헛된 생각’이란 뜻입니다. ‘헛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 많아지고 자기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뭘 하겠다는 둥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2절과 3절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난다’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기독교는 자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우선입니다”

“우매한 자의 셋째 행위는 섣부른 서원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서원을 할까요?”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 싶어서요”
“서원에 대해선 어떻게 배웠습니까?”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배웠습니다”
“5절이 그 근거 구절로 사용되는데요, 솔로몬은 정말 사람들이 서원을 하지 않기를 원해서 이렇게 썼을까요? 솔로몬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글쎄요?”
“사람들이 서원을 언제 할까요?”
“자기의 소원을 강하게 이루고 싶을 때 서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주로 그렇죠. 야곱이 혈혈단신으로 먼 길을 가면서 살아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예가 그런 거죠.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면 저도 저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서원의 아주 다른 예도 나옵니다. 혹시 레갑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아니요”
“예레미야 35장에 보면 레갑과 그의 자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갑은 순수 이스라엘 혈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에 흡수되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기 위해 레갑은 후손에게 주택에 살지 않고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겠다는 서원을 하도록 했고, 후손은 불편한 삶을 살면서 그 서원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 다른 걸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감사와 신뢰의 표현으로 서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서원이 있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보통 자기 소원을 이루려는 데만 서원을 사용해서 그렇죠. 그런 서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고백도 있지만 한편으론 마치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듯한 속셈도 보여서 신앙적으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서원은 하지 않는 게 낫지요”

“이 단락에서 솔로몬은 1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들어라’에 이어, 2절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는 존재 자체가 다른 분이라는 거죠.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7절에서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보일 태도는 이런저런 말을 떠벌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조아리며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내용에서 혹시 질문 있으세요”
“그럼 서원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자기 욕심으로 서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서원을 했다면 지키는 것이 좋죠. 그러나 인간이 어리석고 연약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서원을 어겼다고 구원에서 탈락시키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예전엔 ‘아들을 주시면 주님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 류의 서원이 많았는데, 참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는 걸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인생이 망하고 천국에 가지 못할 것처럼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의 인격은 도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목사만 기뻐하시는 게 아닌데요. 게다가 그 아들이 전교 1등을 하는 수재라면 부모도 자식을 아깝게 여기고 신학교로 보내지 않는 일도 생깁니다. 그냥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애쓰는 삶을 사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