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성경공부(20) – 전 6:3-7

“3절에 ‘사람이 백 명의 자녀를 낳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읽으면서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네요”
“옛날 여인이 결혼하면 평균 몇 명의 자녀를 낳을까요?”
“글쎄요, 5명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녀가 100명이라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아, 아내가 20명이란 말이군요”
“그 아내가 한 방에 모여 합숙할까요?”
“그럴 수 없죠. 다른 방에서 살겠지요. 아, 이 사람은 엄청 부자겠네요”
“그렇죠. 여러 아내에게 거처를 하나씩 마련해 주려면 보통 부자가 아니겠지요. 아내 20명과 자녀 100명이 열심히 농사 지어서 살까요?”
“아, 종들이 엄청 많겠군요”
“한 나라에 이런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극소수일 것 같아요”
“맞습니다. 거의 왕이나 누릴 수 있는 규모지요. 성경에 의하면 북이스라엘 왕 아합은 아들만 70명(열왕기하 10:1),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은 아들 딸 합쳐 88명(역대하 11:21)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답니다. 만족하지 못한답니다. 이해가 되세요?”
“이해가 안되죠”
“그러게 말입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왕비가 여럿 있었음에도 남의 아내를 탐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지 못하고 만족하지 않는 거죠. 또 그런 조건을 누리며 살았는데도 안장(安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자로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왜 안장되지 못하죠?”
“성경 열왕기에 보면 가끔 왕임에도 불구하고 ‘열왕의 묘실에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 경우인 거죠”
“아, 그런 구절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다음으론 낙태된 자입니다. 전도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갔다’라고 표현합니다. 분명히 인간 존재로 왔다는 거죠. 하지만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고 세상에서 존재를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현인 이름도 가져 보지 못하고 ‘어두움’ 중에 갔다고 했습니다. 너무 딱하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낙태에 관한 판단을 한 것이 전세계적인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요. 생명에 대해서는 정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행복하고 만족하지 않으면 그렇게 낙태된 생명보다 나은 게 없다는 겁니다. 예라고 하기엔 너무 극단적으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솔로몬은 행복인 줄 알고 추구했는데 참 행복이 아닌 것을 너무도 크게 느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솔로몬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 최고의 목적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행복과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요. 여기서는 그냥 우리가 사용하는 ‘행복’의 의미로 봐도 별로 상관없습니다. 6절에 ‘천 년의 갑절을 산다’면 몇 년을 사는 것일까요?”
“2천 년이겠네요”
“그렇죠. 진시황이 그렇게 바랬던 것처럼 불로불사의 인간이 되어 2천 년이나 살아도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결국 무익하다는 겁니다. 장수가 소용없다는 거죠. 솔로몬도 행복이 최고의 선처럼 말한 건데, 그리스 철학을 정립했다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거의 5백 년 전입니다”

“7절에 정말 시적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사람은 일단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일을 합니다. 굶주림이 해결되면 어떻게 할까요? 똑같은 음식을 놓고 생각한다면요”
“더 맛있는 걸 찾겠지요”
“그렇죠. 맛집들을 찾아가죠. 맛만 있다면 허름한 집도 갑니다. 그 다음은요?”
“글쎄요?”
“맛도 있으면서 우아하고 분위기 좋은 집을 찾습니다”
“맞아요, 그렇네요”
“그 다음은 어떨까요? 조명, 그릇, 인테리어 등을 소유하고 싶어하죠”
“정말 그래요”
“7절 후반부에 나오는 ‘식욕’이란 단어의 원래 의미는 ‘영혼’입니다. 정말 시적으로 잘 표현한 것 같아요. 배가 고파서 음식으로 채웠는데 몇 시간만 지나면 다시 굶었던 것처럼 배가 고프니까요. 영혼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영혼의 허기짐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