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성경공부(30) – 전 9:1-6

더워도 너무 더운 폭염이 계속됐다.
가장 덥다는 오후 2시에 성경공부를 위해 낮은울타리를 찾아오시는 두 분이 참 귀하게 생각된다.
나는 20분 전쯤 에어컨을 튼다.
들어오시면 시원하고 상쾌함을 느끼시길 바라기 때문이다.

늘 바로 공부방으로 들어가시는 분들께 나는 먼저 음료를 권한다.
남편분은 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원하시고, 아내분은 같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드실 때도 있지만 오미자청이나 매실청을 냉수와 얼음으로 시원하게 해서 드실 때도 있다.
나는 처음엔 커피를 마셨지만 나중엔 오미자청이나 매실청을 마신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하면 입이 쓰기 때문이다.
갑자기 예배 시간에 사탕 까서 드시던 할머니들이 생각난다.

음료를 한 모금씩 마신 후, 전도서 9장 1절부터 6절까지 한 절씩 읽었다.
“1절부터 4절까지 자주 반복되는 단어를 찾아보시겠어요?”
금방 답이 나왔다.
“모든?”
한 눈에 봐도 너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금방 찾으셨네요. 이제 시가서의 흐름을 금방금방 찾아내실 수 있겠습니다. 그럼 ‘모든’이나 ‘모두’가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시겠어요?”
아내분은 내가 반복되는 단어를 찾으라면 본문을 소리내어 읽는다.
그래야 눈으로 놓친 것을 귀로도 찾을 수 있다고 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10번이네요”
“예, 맞습니다. 전도서는 시가서라고 했습니다. 다른 문체보다 단어에 더 무게감이 있다는 겁니다. 넉 절 안에 같은 단어가 10번이나 나오는 건 분명히 이 단어에 솔로몬이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겠죠? ‘모든’ 외에 그 다음 자주 나오는 단어도 찾아보시겠어요?”
이번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바로 앞 장에서 잘 나오지 않던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는 게 있습니다”
“아, ‘일반’이네요”
“예, ‘일반’은 몇 번 나오나요?”
“4번요”
“모든, 모두, 일반은 예외없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들의 반복 회수를 합하면 14회나 됩니다. 시어의 융단폭격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 내용이 안타깝게도 공의나 공정과는 거리가 좀 먼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번 볼까요? 의인이나 지혜자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할까요, 미움을 받아야 할까요?”
“사랑을 받으면 좋죠”
“옳은 일을 하고 유익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여깁니다. 그런데 실제 그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의인이라는 것 자체 때문에, 지혜자라는 것 자체 때문에 무조건 사랑 받지 못하고 도리어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면서 의인이나 지혜자가 미움을 받아 해를 당하는 건 하나님이 좀 너무 하신 것 같지 않으세요?”
“좀 그런 면이 있기도 하죠”
“비신자들은 그럴 때 ‘하나님이 진짜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내버려 두실 수가 있냐?’며 따지기도 하지요”
“맞아요”
“그 답은 3절에서 찾겠습니다”

“2절에는 ‘모든’과 ‘일반’이 여섯 번 나옵니다. 넉 절에 총 14회 반복되는데, 한 절에 절반 가까이 나오는 셈이죠. 그렇다면 2절에 뭔가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열거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죠?”
“반대되는 사람들인데요”
“맞습니다. ‘의인과 악인’,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않은 자’같이 반대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도 나오는데요, 여기서 ‘제사를 드리는 자’는 우리 나라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조상을 섬기거나 다른 신을 섬기는 제사를 지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 곧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를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죠. 그런데 주일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자와 주일 예배를 심심하면 빠지는 자가 당하는 일이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굳이 주일 성수를 하기 위해 애쓸 것 같지 않은데요”
“그렇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이 왜 억울할까요?”
“하나님을 잘 예배했으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니까 그냥 피조물로서 예배하는 게 아니라 어떤 기대가 있었던 거네요”
“아, 그렇게 되는 군요”
“이어지는 3절에 더 신랄한 표현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잘 쓰는 표현이 또 나왔습니다.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 악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아무리 의인이고 지혜자라도 그 속에는 악이 있다는 겁니다. 둘째는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얌전하고 착한 사람도 실은 속에 어떤 광기를 숨기거나 억누르고 있는지 모르죠. 하지만 솔로몬은 적나라하게 인생을 파헤쳤습니다. 아무리 의인이고 지혜자라도 해도 다 죄와 광기를 감추고 있는 죄인이고 악인이라는 겁니다. 이런 내용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으세요?”
“글쎄요”
“교리 쪽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적타락?”
“맞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해서 사실 모두가 똑같이 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일반’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네요”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지요. 3절 마지막에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지요?”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죽는다는 뜻이겠죠”
“맞습니다. 그건 점잖은 표현이고요. 3절을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인생은 마음에 악이 가득해, 실은 광기를 가득 담고 있는 거야. 그 다음은 어떻게 되냐고? 모두 다 뒈지는 거지. 그밖에 뭐가 있겠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조금 의인과 조금 악인만 있을 뿐 모두 똑같고, 그들에게는 고난과 죽음만 기다릴 뿐이라는 걸 솔로몬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겐 소망이 없다는 거죠. 그럼 소망 없이 끝난다는 걸까요?”
“구원자를 바라겠지요”
“맞습니다. 솔로몬은 지금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으니 하나님이 보내시는 구원자를 바라야 한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4절부터 6절은 그래도 산 자에게는 소망이 있음을 말합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죽은 자들은 다시 상을 받지 못한다’, ‘죽은 자들의 이름은 잊혀졌다’, ‘죽은 자들은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졌다’, ‘죽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돌이킬 기회도 있고, 구원자를 바랄 소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회개하고, 구원자를 믿는 일을 놓치지 말고 반드시 하라는 겁니다. 솔로몬은 정말 강력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시가서라 시적으로 표현되었지만 독자는 그 농도를 제대로 살려서 읽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전도서가 이런 의미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이렇게 전도서를 이해하며 읽으니 정말 좋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원색적인 복음 그 자체를 원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