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

(5년 전에 쓴 글)

지금부터 약 4천년전 인류문명 발상지인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는 각각 이집트와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있었다.
이 제국들은 우월한 문명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나라와 민족들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을 노예로 삼아 자국을 떠받들도록 만들었다.
대제국이었지만 엄격한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폐쇄적인 구조였다.
그 제국중 하나인 이집트가 그 노예계급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노예들은 고역으로 고통 중에 있었다.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그 노예들의 고통을 듣고 보셨다(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그리고 초자연적인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노예계급을 해방시키셨다.
그 때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의 순수혈통후손만 해방되어 이집트를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같이 노예생활을 하던 다른 민족들도 함께 이집트를 나왔다(출 12: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그런데 성경은 그들 모두를 향해 “여호와의 군대”라고 칭했다(출 12: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하나님은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시기전 유월절을 제정하실 때 “이스라엘 회중”에 대한 기준을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는 자라고 하셨다(출 12:18,19 “첫째 달 그 달 열나흗날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니”, 출 12:49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그들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그들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역사를 통해 보듯 인간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폐쇄적이고 타자와 공존하기 보다는 굴복시키는 공동체를 만들기에 익숙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대국가 이집트와 바벨론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제국이 대세인 시대에 “제사장 나라”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개방적이고 외부지향적인 나라를 세우셨다.
창세기에서 족장들의 계보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공동체의 성격을 출애굽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에서 보이듯 그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다른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그들에게서 조공을 받으며, 그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더 순혈주의가 되었고, 더 국수주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은 세상 속에서, 다른 민족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이었으나, 그들은 성전과 율법으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믿었다.

신약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분명히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여호와를 섬기는 종교가 있었고, 성전이 있었고, 제사와 율법이 있었다.
바벨론 포로기와 알렉산더제국, 시리아제국, 로마제국의 식민지를 겪으면서 유대인들은 더욱 폐쇄적으로 변했고 이방인과의 접촉을 부정하게 보았다.

이럴 때 예수님은 그들 속에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리적으로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라(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고, 민족적으로는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고 하셨다.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 성격이 개방적이고 외부지향적이다(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한국교회도 처음엔 그 성격을 유지했다.
엄청난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고, 윤리와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치 혼탁해진 사회 속에서 도덕수준을 유지했고,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웠어도 가난과 고통중의 이웃들을 도왔다.
지역사회가 기독교 신앙 자체를 받아들이기는 힘들어도 사회에 유익한 공동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목사들은 지역사회의 양심있는 지도자로 존중받았다.
그러나 경제성장기와 함께 찾아온 미국 중산층 백인을 중심으로 하는 대형교회와 그 교회들을 모방한 대형교회를 모델로 하는 교회의 운영방식은 교회의 성격을 변질시켰다.

“토착화”라는 선교학 용어가 있다.
성경과 신앙의 중심내용은 바꿀 수 없지만 복음이 들어간 그 나라와 민족에 따라 변화를 줄 수 있는 스타일이 있다.
예를 들면 일어서서 찬양하든 앉아서 찬양하든, 빠른 박자로 찬양하든 느린 박자로 찬양하든, 클래식 악기로 하든 전자악기를 사용하든 그것은 진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주려고 해도 “토착화”가 아닌 “변질”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공동체의 특징인 개방적, 외부지향적인 성격을 버리고 변질한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신약의 유대교처럼 폐쇄적, 내부지향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경제성장기 대형교회의 모델을 따라 목회를 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
부교역자 시절에는 맡은 일 감당하기가 바빠 본질이나 방향에 대한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심방 등 교구관리를 잘 하고, 행사준비와 진행을 잘 하면 사역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방향과 본질에 대한 고민을 가장 우선해야 하는 담임목사가 여전히 교구관리방법이나 행사진행방법에 대한 고민에 머물 수 없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공동체의 성격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누가 가르쳐준다면 성실히 감당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