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전화

오늘(1/19)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부산에 내려왔던 2018년 가을에 만났던 분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독교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와 몇 차례 만나면서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나는 그후로 지금까지 그분을 위해 기도하며, 내 기도명단 가장 위에 올라 있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서로 안부를 묻는 톡을 하거나 통화를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주로 문자를 보내고 그분은 주로 전화를 한 것 같다.
오늘도 그분이 전화를 했다.

“목사님, 잘 지내십니까?”
“예~,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예, 잘 지냅니다. 목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통화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늘 그렇듯 아주 정중한 음성으로 내 안부와 통화가 괜찮은지 묻고 내용을 시작한다.
나는 종종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오는 기독교인의 전화를 받는다.
목소리를 깔고 불쾌한 티를 내며 단답형으로 말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훨씬 기분 좋은 통화이다.

“목사님, 저에게 좀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 그래요? 무슨 변화가 생긴 건가요?”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믿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신자인 아내를 따라 교회를 가긴 하지만 가끔 나와 연락할 때는 오히려 그 고충을 토로하던 분이었기에 긍정적으로 들리면서도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거요?”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신이란 존재에 대한 인정을 하게 되셨다는 것이군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분은 철저한 무신론자였고 신앙에 열심있는 모습을 맹신 또는 광신이라 표현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너무도 반가웠다.

“장족의 발전인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계기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의지할 곳을 찾게 되고, 그래서 신을 믿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고통이 심하다고 다 신을 인정하고 신을 믿게 되는 건 아닙니다. 노숙자와 쪽방촌 사역을 하는 동기 목사님을 따라 그분들을 쪽방촌과 지하철 역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깊은 절망 때문에 가족을 떠나고 심지어 주민등록도 말소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말씀처럼 현실에는 소망이 없으니 신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있다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라며 강하게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군요.”
“예, 그래서 고통이 어떤 계기가 될 수는 있겠지만 고통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신을 인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신을 인정하는 심정이 이해가 된다고 하는 건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이걸 기독교에서는 소위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아~ 그런 건가요? ㅎㅎ”

“제가 2018년 처음 뵌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선생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 기도명단 제일 위에 선생님의 성함이 있습니다.”
“아이쿠, 감사합니다. 목사님이 기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목사님은 저에게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신 분이라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5년간의 기도가 내 머리 속만 맴도는 메아리가 아니었음이 정말 감사했다.
“목사님하고 이야기도 하고 싶고, 성경에 대해서 질문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답답하지 않고 뭔가 통하는 게 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전화하십시오. 시간 내겠습니다.”
끊고 보니 45분이나 통화를 했다.